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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 고서(한국본)
소장분관 : 도서관
기타분류기호 : MF16-1383
서명 / 저자 : 력翁稗說. 全/ 李齊賢(朝鮮) 著
개인저자 : 이제현 (朝鮮)
판사항 : 木版本
발행사항 : [ ]: [ ], 鷄林 萬曆 28(1600)
형태사항 : 2卷1冊: 四周單邊 半郭 21.5 x 16.2 ㎝, 10行18字, 上下三葉花紋魚尾; 33.8 x 23.1 ㎝
일반주기 : 序 : 仲思(李齊賢)序 跋 : 宣德壬子(1432) … 金빈奉敎敬跋 刊記 : 萬曆庚子(1600)鷄林府重刊
복제주기 : 마이크로필름.
마이크로필름 릴 ; 16 mm
언어주기 : 版心文字 : 說
청구기호 : D7C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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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가정보

<력0x5D61>翁稗說
朴魯春
李齊賢의 生涯
李齊賢의 生涯에 關한 文獻으로는, 『益齋集』에 있는 「益齋先生年譜」와 「鷄林府院君 諡文忠李公墓誌銘」(牧隱李穡 지음」과, 『高麗史』에 있는 李齊賢列傳이 있다. 「益齋先生年譜」를 中心으로 하여, 李齊賢의 生涯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李齊賢의 字는 仲思이고, 號는 益齋 또는 <력0x5D61>翁이니, 本貫은 慶州이다.
1287(忠烈王 13, 丁亥)年 12月 庚辰日에 慶州에서, 檢校政丞 <진0x73B2>(號東庵, 諡號 文定公)과 載陵直인 朴仁育의 딸인 辰韓國大夫人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301(忠烈王 27, 辛丑)年에, 나이 15歲로써, 常侍 鄭<선0x6603>이 試官이 된 成均試에 壯元하였고, 이어서, 菊齋 權溥와 悅軒 趙簡과가 試官이었던 丙科(知貢擧)에 及第하였다. 이 해에 權溥의 딸을 맞아 婚禮하였다.
1303(忠烈王 29, 癸# )년, 17歲, 權務奉先庫判官·延慶宮錄事가 되었다.
1308(忠烈王 34, 戊申)년, 22歲, 뽑혀서 藝文館·春秋館에 들어갔다. 겨울에 齊安府直講으로 옮겼다.
1309(忠宣王元, 己酉)년, 23歲, 司憲糾正에 뽑혔다.
1310(忠宣王 2, 庚戌)년, 24歲, 選部散郞으로 옮겼다.
1311(忠宣王 3, 辛亥)년, 25歲, 다시 典校寺丞 三司判官으로 옮겼다.
1312(忠宣王 4, 壬子)년, 26歲, 뽑혀서 西海道按# 使가 되었다. 成樂正으로 昇進되었고, 겨울에 豊儲倉事에 올랐다.
1313(忠宣王 5, 癸丑)년, 27歲, 內府副令을 拜命하여, 斗# 를 監査하고 # 銖를 校# 하여 難色이 없으니, 사람들로부터 先生可謂不器君子라는 말을 들었다.
1314(忠肅王元, 甲寅)년, 28歲, 白# 正이 元나라에 있을 때, 程朱學을 高麗 사람으로서는 처음 理得하여 高麗로 돌아왔는데, 李齊賢이 첫 번째로 그를 스승으로 하여 가르침을 받았으니, 東方 理學의 倡明의 嚆矢를 이루었다.
그림 1
이때, 忠宣王은 王位를 忠肅王에게 물려주고 大尉王으로서 燕京에 머물러 살면서 萬卷堂을 짓고, 書와 史로써 自誤하였는데, 京師文學之士 皆天下之選 吾府中未有其人 是吾羞也라 하는, 上王(忠宣王)의 召命으로 正月에 燕京에 가서, 元나라 學士 姚燧(牧庵)·閻復(子靜)·元明善(復初)·趙孟<부0x63A1>(子# )와 相從하여 學問이 더욱 進就하니, 姚燧等이 稱讚하기를 마지않았다.
1315(忠肅王 2, 乙卯)年, 29歲, 選部議郞으로 옮겼고, 가을에 成均祭酒를 兼職하였다.
1316(忠肅王, 3, 丙辰)年, 30歲, 判典校寺事가 되었다. 4
月에, 進賢館提學으로 옮겼다. 이 해에 西蜀에 奉使하매, 이르는 곳마다, 題詠하여 人口에 膾炙하였다.
1317(忠肅王 4, 丁巳)年, 31世, 選部典書를 拜命하였고, 9月에 王命으로 元나라에 가서 上王(忠宣王)의 誕日을 祝賀하였다.
1319(忠肅王 6, 己未)年, 33歲, 上王(忠宣王)이 江南(# 江省)에 降香할 적에 權漢功과 더불어
從行하였는데, 忠宣王이 樓臺의 佳景을 만날 때마다. 懷抱를 풀며 此間不可無李生也라고 말하였다.
이때에, 忠宣王은 古杭 吳壽山을 불러서 李齊賢의 眞像을 그리게 하고, 北村 湯炳龍으로하여금 眞影에 贊을 짓게 하였다. (그 後, 32년만에 國表를 받들어 燕京에 갔을 때, 李齊賢은 그대의 肖像畵를 보고, 我昔留形影/靑春兩<빈0x6497>春이라는 詩句를 남겼다.
1320(忠肅王 7, 庚申)年, 34歲, 7月에 知密直事에 오르고, 端誠翊# 功臣號를 받았고, 土地 奴婢(臧獲)을 下賜받았으니, 燕·吳에 侍從한 功의 賞인 셈이다. 奏하여 高麗王府斷事官에 除授되었다. 9월에 있은 知貢擧에서 崔龍甲·李穀等을 뽑았는데, 王은 그 사람 얻음을 嘉尙하여 銀# 50과 쌀 100石을 내려주었고, 學士宴을 베풀어주었다.
겨울에 元나라에 갔다가, 黃士店에 이르러서, 上王이 讒訴를 당하였으나 스스로 解明하지 못한다는 소문을 듣고, 시름을 이기지 못하여, 「黃土店詩」3篇과 「明夷行」1篇을 지었다.
1321(忠肅王 8, 辛酉)年, 35歲, 元나라 宦者 伯顔·禿古思의 讒訴로, 上王(忠宣王)이, 燕京에서 五千里나 떨어져 있는 吐蕃 撤思結地方에 귀양가 있을 때, 侍臣이 다 逃亡하고, 朴仁幹·張元祉等 18名이 上王(忠宣王)을 따라 配所로 갔었다. 李齊賢은 京都(燕京)에서 上王의 邸宅을 지키며, 忿한 뜻이 가득한 詩를 지어, 政丞 柳淸臣과 贊成 吳潛에게 올려서, 忿한 가슴을 폈다. 이 해에 아버지(東庵, 文定公) 이 세상을 떠났다.
1323(忠肅王 10, 癸亥)年, 37歲, 柳淸臣·吳潛이 都省(中書省)에 上書하여 省(生省)을 本國(高麗)에 세워서 內地(元나라)와 같이하기를 請하매, 國其國 人其人(中庸九經章 綏遠人之義)의 原則을 들어서, <함0x7A0B><함0x7A0B>히 數千言으로써 그 不當性을 主張排斥하는 上書를 하여서 그들의 謨意를 꺽어버려 가지고 危機를 冒免하였다.
이때, 上王(忠宣王)이 아직도 吐蕃에 있으므로, 上王의 被誣之事와 그 辛苦相을 들어서 긴 上書文을 元郎中과 丞相 拜住에게 올렸다. 縷縷히 數千言으로 된 긴 上書文은 辭旨가 懇側·忠憤·激切하여 拜住의 마음을 느Z게 하였다.
拜住가 元帝에게 請하여 上王을 思麻(甘肅省 臨<조0x7219>附近)로 옮기려 하였다. 李齊賢이 가서 上王(忠宣王)을 謁見하였는데, # 中에서 謳吟하였으니 忠憤心을 <애0x6960>然히 나타내었다.
1324(忠肅王 11, 甲子)年, 38歲, 匡靖大夫 密直司事가 加授 되었다.
1325(忠肅王 12, 乙丑)年, 39歲, 推誠亮節功臣號를 改賜받고, 僉議評理政堂文學에 再轉되었고 金海君에 皮封되었다.
1326(忠肅王 13, 丙辰), 年, 40歲, 三司使로 轉移하였다.
1330(忠肅王 17, 丙午)年, 44歲, 政堂文學이 되었다가 얼마 안 가서 罷職하였다.
1336(忠肅王 復位 5, 丙子)年, 50歲, 三重大匡으로써 藏文館事를 領하였다.
1339(忠肅王復位 8, 己卯)年, 53歲, 2月에 忠肅王 昇遐하고, 忠惠王이 卽位하자, 政丞 曺<적0x70A4>가 百官을 脅迫하면서 임금 側近의 惡小輩를 쫓겠다는 美名下에 永安宮에 軍士를 駐屯시키고, 實은 忠宣王의 長姪인 瀋王 # 와 通謀하여 不測之變 卽 政變을 꾀하고 있었다. 이를 앞질러 알아차린 忠宣王이 輕騎로 나아가 曺<적0x70A4>을 쳐서 죽였다. 그러나 曺<적0x70A4>의 殘留 徒黨은 元都(燕都)에 있어 가지고, 忠宣王의 罪를 갖가지로 謀陷하자, 끝내는 元帝가 使者를 보내어 忠宣王을 불러다가 重臣 金倫·韓宗愈等과 함께 投獄하게 되니, 장차 그 禍가 어디까지 미칠지 헤아릴 길이 없었다. 이때 李齊賢은 決然히 吾知吾君之子而已라고 외치면서 忠宣王을 侍從 하였다. 京師에 들어가서는 代舌以筆로 일의 그릇됨을 辨析하매 元帝가 이를 깨닫고 忠宣王을 풀어 復位케하니, 모두 悚然하여 기르기를 益齋는 膽이 몸보다 크다라고 하였다. 功이 一等에 있으므로 鐵券을 賜하였다.
1340(忠惠王復位元, 庚辰)年, 54歲, 4月에 故國으로 돌아와서 「齊化門酒樓」詩를 지었다. 돌아오니 群小輩가 더욱더 煽動하므로 屛跡하고 不出하였다.
1342(忠惠王 4, 壬午)年, 56歲, 여름에 「<력0x5D61>翁稗說」을 지었다.
1343(忠惠王 5, 癸未)年, 57歲, 元나라 使臣 朶赤의 무리가 와서 郊天赦詔를 頒布한다 하므로, 忠惠王이 그런 줄로만 알고, 迎接次로 城밖으로 나갔더니 朶赤이 칼을 휘두르며 王을 붙잡아 돌아갔다. 諸臣이 愴惶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李齊賢을 釋放의 疏를 올려서 釋赦를 請하였다. 그러나, 忠宣王은, 燕都에서 2萬里밖인 揭揚에, 從者 한 사람 없이 定配되어 가다가, 中路 岳陽에서 昇遐하였다. 이 때 李齊賢이 겪은
悲嘆은 比할 바가 없었다.
1344(忠惠王 5, 甲申)年, 58歲, 겨울에 忠穆王이 즉위하니 나이가 8歲이었다. 判三司事에 任命되었고, 府院君으로 昇進되었으며, 領孝思觀事에 任命되었다. 書筵을 設置하고 先生을 스승으로 삼았다.
1346(忠穆王 2, 丙戌)年, 60歲, 箋文을 올려서 書筵講說의 職任을 解免하도록 빌었고, 贊成史 安軸과 密直副使 李穀을 薦擧하여 代身하게 하였다.
5月에 「孝行錄」62孝贊을 撰하였다. 11月에에 王으로부터, 閔漬가 撰修한 「本朝編年綱目」에 闕漏가 많으니 重撰하라는 命令을 받아서 그 일을 하였다. 또, 忠烈·忠宣·忠肅의 3王의 「三朝實錄」을 엮으라는 命令을 받았다.
이 해에, 聘父인 文正公 菊齋 權溥의 訃를 받았다.
1348(忠穆王 4, 戊子)年, 62歲, 3月에 提調經史都監이 되었다. 12月에 忠穆王이 죽자, 表文을 받들고 元나라에 가서 忠定王을 세워 繼位할 것을 奏請하였다.
1351(忠定王 3, 辛卯)年, 65歲, 겨울에 忠定王의 昇遐로 王位에 오른 恭愍王으로부터, 미처 還國하지 못한 채, 右政丞權斷征東省事에 任命되었으나, 이를 固辭하자, 許諾하지 아니하고, 또 都僉議政丞을 命하였다. 李齊賢은 法司에게 地方 巡察을 지키는 한편, 百姓의 疾苦를 묻고, 功過의 按廉과 賢俊의 登用에 힘쓰며, 奸臣을 쫓아내어 政令을 바로잡아 나아가니, 그때 王이 元都에 머문 지 數月이 지나, 나라가 비었으되, 李齊賢의 穩當한 處事에 힘입어 安定할 수 있었다.
1352(忠<벽0x6288>王元, 壬辰)歲, 66書, 筵을 열자, 다시 侍講이 되었다. 王을 擁立한 趙日新의 猜忌와 橫暴을 避하여 謝意를 表하였으나 允許하지 않고, 도리어 推誠亮節同德協義贊化功臣號를 내렸으나, 굳이 致仕하였다. 이 해에, 不良輩와 作黨한 趙日新이 宮中에 闖入하여 殺人劇을 벌이다가 伏誅한 뒤, 다시 復職되어 右政丞이 되고 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號를 下賜 받았다.
1353(恭愍王 2, 癸巳)年, 67歲, 政丞을 辭任하고 府院君으로 知貢擧가 되어, 李穡을 뽑아 또다시 人才 選別의 能力을 誘示하였다.
1354(恭愍王 3, 甲午)年, 68歲, 다시 右政丞이 되었다.
1355(恭愍王 4, 乙未)年, 69歲, 政丞을 辭任하였다.
1356(恭愍王 5, 丙申)年, 70歲, 逆臣 奇轍等의 伏誅가 있었다. 王은 沒收한 그들의 財物을 兩府에 下賜하였으나, 李齊賢은 自身에게는 功이 없음을 理由로 이를 辭讓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그는 門下侍中이 되었다.
1357(恭愍王 6, 丁酉)年, 71歲, 本職 그대로 致仕하여, 國法에 따라 封君致仕한 者로서의 더 많은 祿俸을 누렸다. 休暇로와지자 술을 마련하여 두고, 손을 맞아 古今 政事를 談論하였다. 나라에 큰 일이 있으면, 王이 반드시 諮問을 請하였으며, 때로는 經史를 講論하고, 治道를 물으면, 前例를 들어 昭詳한 譬喩로써 아뢰고 어려운 일을 힘써 다하도록 懇曲히 勸勉하니, 王이 더욱 尊重하였다.
집에서 國史를 엮으니, 史官과 三館이 다 모였다.
「金鏡錄」을 撰하고, 또 國史의 不備를 못마땅히 여겨 「紀年傳志」를 撰하였다. (이 두 撰述書는 나중의 紅巾賊亂에 散失되고 말았다.)
1359(恭愍王 8, 己亥)年, 73歲, 孫子, 寶林을 위하여 「呈執政」詩를 지였다.
1361(恭愍王 10, 辛丑)年, 75歲, 2月에 書經 無逸篇을 講義하라는 王命이 있었다.
1362(恭愍王 11, 壬寅)年, 76歲, 紅巾賊에게 서울이 陷落되어 御駕가 南쪽으로 播遷하였다. 달려가 尙州에서 王을 뵙고, 今日播遷何異玄宗祿山之亂이라고 눈물을 뿌리면서 嘆息하고, 扈從하여 淸州에 이르렀다. 拱北樓에 올라 應製詩를 지어 바쳤다. 다시 鷄林府院君에 封해졌다.
1363(恭愍王 12, 癸酉)年, 77歲, 王이 淸州에 머물러있으면서, 還都할 뜻을 보이지 않으므로, 여러 宰相을 이끌고 나아가, 빨리 還都하기를 進言하였더니, 王이 李諫言에 따랐다.
1365(恭愍王 14, 乙巳)年, 79歲, 王이 辛旽에게 迷惑되어 # #하므로, 王께 臣嘗一見旽 其骨法類古之凶人必胎後患 請上勿近이라고 忠諫하였다. 辛旽은 이 進言에 깊이 怨恨을 품고 李齊賢을 百端으로 헐뜯었으나 年老하므로 加害는 못했다.
1367(恭愍王 16, 丁未)年, 81歲, 7月에 집에 病死하였다. 太常府에서 諡號를 文忠이라고 하였다. 10月에 관에서 禮節을 갖추어 牛峯縣 桃李村에 있는 先塋에 葬儀하였다.
1376(禑王 2, 丙辰)年, 死後 9年, 恭愍王의 廟廷에 配享되었다.
李齊賢의 著述
李齊賢의 著述로, 오늘날 남아서 傳하는 것은, 『益齋集』(一名 『益齋文集』)으로 汎稱되는 것뿐이다.
『益齋集』은 「益齋亂藁」10卷과 「<력0x5D61>翁稗說」4卷과 「拾遺」1卷(?)과로 이룩되어 있다.
李齊賢의 文集은, 이렇게 「亂藁」와 「稗說」의 두 가지인 바, 이를 合하여 「益齋集」이라고 하기도 하고, 或은 「亂藁」만을 가지고도 「益齋集」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하여
一定하지 않다.
「益齋亂藁」는 그의 季子인 # 路와 長孫인 寶林이 一部가 이미 散佚된 그의 原稿를 모아 編刊한 것이다. 李齊賢은 그이 父親 東菴 李<진0x73B2>의 文集이 아직 刊行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自己의 文集은 생각할 수 없다 하여, 自己의 글을 잘 간수하지 않아 完全한 全集이 될 수 없었고, 따라서 刊行된 文集도 그 이름을 <亂藁>라고 하였다.
이 「益齋亂藁」는 1363(恭愍王 12, 癸酉)年 卽 그가 逝去하기 3年 前에 처음으로 刊行되었고, 그 序文은 그의 門生인 牧隱 李穡이 지었다. 이 初刊本은 現傳해지고 있는 것이 없으나, 朝鮮期에 들어와서는, 여러 차례 重刊되었다. 朝鮮王朝實錄에 나타난 『益齋集』刊行에 관한 最初의 記事는 世宗實錄 13年 辛亥(1431) 5月 乙酉 條에 다음과 같이 보인다.
贊成許# 啓 東人文·益齋集·學者軌範不可不行於世請刊廣布……命代言等曰 令提學尹# 參判申墻等 改校東人文·益齋集 <비0x640B>鑄字印行
이 記事에 依하면, 世宗이 鑄字本으로 印行하도록 命하고 있으나, 實地는 그 計劃이 바뀌어 木刻本으로만 刊行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金<빈0x6490>의 跋文으로써 알 수 있다.
宣德六年夏 殿下文臣# 正繕寫刊于江原道之原州……歲宣德壬子秋七月日 朝奉大夫 集賢殿應敎 藝文應敎 知製敎經筵檢討官 臣金<빈0x6490> 奉敎敬跋
이라고 하였으니, 宣德六年夏는 앞의 世宗實錄의 世宗十三年辛亥五月과 一致한다. 만일, 鑄字本으로 刊行되었다며 金<빈0x6490>이 위와 같은 內容의 跋文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原州刻 壬子本이 鮮朝에 들어와서는 최초의 刊行된 重刊本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1600(宣祖 33, 庚子)年에, 그의 11代孫인 碧梧 李時發이 慶州府尹 在任時에 彫板한 刊本이 있는데, 이 刊本의 跋文은 西厓 柳成龍이 지었다.
그 後, 1693(肅宗 19, 癸酉)年에 역시 慶州에서 府尹으로 있던 許<경0x5561>이 重刻한 板本이 있다. 이 刻板때, 詩文의 拾遺와 年譜·墓誌銘(牧隱 李穡 撰)이 追補錄되었다.
그러나, 이 板木도 이미 오래 되어, 字劃의 <완0x6BE5>缺이 甚하므로, 1814(純祖 14, 甲戌)年에 慶州에 居住하는 後孫들이 <완0x6BE5>刻이 甚한 字板을 新刻補板하고 年譜의 一部를 補錄하고 拾遺를 添錄하고, 慶尙道 觀察使 慶州人 金魯應의 <職>을 붙여서 刊行하였다.
그 後의 刊本으로는, 1911年에 朝鮮古書刊行會의 「破閑集」(李仁老著)·「補閑集」(崔滋著)「東人詩話」(徐居正著)·「雅言覺非」(丁若鏞著)와의 合輯으로 活版洋裝本이 나왔고, 1913年에 日本 東京의 民友社에서 「<력0x5D61>翁稗說」만을 影印本으로 刊行한 바 있다. 1973年에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에서, 『高麗名賢集』으로, 「西河集」(林椿)·「破閑集」(李仁老)·「補閑集」(崔滋)·「止浦集」(金坵)·「梅湖遺稿」(陳<화0x7BCD>)·「拙印千百」(崔瀣)·「謹齋集」(安軸)과의 合輯으로 影印本이 나왔다.
參考로, 「益齋亂藁」의 內容을 表示해보면 다음과 같다
第1·2·3·4卷…詩
第5卷…序
第6卷…書·記·碑
第7卷…碑銘
第8卷…表
第9卷 上…世家 下…史贊
第10卷…長短句
「<력0x5D61>翁稗說」解題
「<력0x5D61>翁稗說」은, 李齊賢의 나이가 圓熟期라고 말할 수 있는, 宦路에서 물러 나와 本第에 蟄居하던 56歲때인 1342(忠惠王 3)年에 執筆·著作한 것이니, 前集 一·二 2卷, 後集 一·二 2卷, 全4卷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력0x5D61>翁稗說」의 內容은 多樣하여, 歷史談, 經史의 見解, 王家의 世孫, 異聞·奇事, 人物評, 벼슬아치의 言行, 逸話, 諧謔談, 書畵의 品評, 詩文의 批評論等으로 되어 있다.
이를 槪括하여 말하면, 前集은 隨筆類의 雜錄이요, 後集은 詩話·詩評類의 評論이다.
그리고, 「<력0x5D61>翁稗說」은, 前集 一에는 序文을 빼고 16話 前集 이에는 43話, 合 60話, 後集 一에는 序文을 배고 28話, 後集 二에는 25話, 合 53話, 都合 113話가 收錄된 책이다. 「<력0x5D61>翁稗說」은 歷史·人物·經典을 論하고, 아울러 詩文書畵를 批評하고 있어서, 高麗 末葉의 批評文學을 代表하고 있다. 그가 高麗文壇에서 末期의 人物이고, 또한 詩詞文의 大家였고, 經史에 能通한 文豪였기 때문에, 그의 詩文 評論은 우리 文學史上 重要한 位置에 있다. 特히 그는 文學의 永遠性과 普遍性을 가장 强調하였던 사람이다.
高麗朝의 批評文學은, 大體로 이른바 用事論과 新意論의 論爭이요 그 對決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력0x5D61>翁稗說」에도 用事에 關한 言及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남의 詩를 酷評하지 않았다는 特徵도 있다.
「<력0x5D61>翁稗說」이야말로, 아무런 抱碍도 받지 않고, 一定한 主題도 없이, 自由自在로 쓰고 싶은 것을 쓰고,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한 隨筆이다. 그러므로「<력0x5D61>翁稗說」에서 人間 李齊賢의 體溫을 느끼고, 文章家 李齊賢의 香氣를 맡을 수 있으며, 또 李齊賢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속에는 李齊賢의 該博한 知識과 爲國衷情의 忠誠心과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人間다운 知性이 낱낱이 스며 있다.
그런 意味에서도 「<력0x5D61>翁稗說」은 所重한 文獻이다.
「<력0x5D61>翁稗說」은 李齊賢이 自序에서. 遇所記書諸紙背라고 하고, 本以驅除閑悶 信筆而爲之한 글이다. 이 點을 오늘날의 槪念으로 보면, 「<력0x5D61>翁稗說」은 輕隨筆 또는 重隨筆이라고 할 수 있는, 모두 文藝化한 文學的 隨筆 作品集이라고 말할 수 있고, 또 文學史的으로는 韓國古典隨筆文學의 白眉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李齊賢을 理解하고, 나아가 祖上들의 精神世界를 알기 위하여서는 必讀의 名著라고 아니할 수 없다.
益齋 李齊賢 關係 文獻 目錄
◇生涯(作者論 包含) 關係 文獻
○李昇圭 : 朝鮮名人傳 朝鮮日報社出版部 1939
○金庠基 : 李益齋의 在元生涯에 對하여 大東文化硏究 1963.8
○高柄翊 : 精忠의 鴻儒 李齊賢 人物韓國史 2 高麗 風雲의 群雄 1965 博友社
○李石來 : 六大王을 섬긴 文章 李齊賢 韓國의 人間像 5 文學藝術家篇 1965.4.15 新丘文化社
○車溶柱 : 李齊賢론 韓國文學作家論 1977.9.20 螢雪出版社
○李炫熙 : 李齊賢의 文興 半生 歷史의 故鄕 上 1978.11.1 日曜新聞社
◇ 思想 關係 文獻
○金哲埈 : 益齋 李齊賢의 史學에 對하여 東方學志8 1967
○金泰永 : 高麗 後期 士類層의 現實 認識 創作과 批評 44(第12卷第2號) 1977.6.5
○朴性奎 : 高麗 詩人의 現實 認識-李齊賢의 抗蒙意識을 中心으로-우리文學硏究 3 1978.12.30
○金哲埈 : 高麗時代 歷史意識 變遷 韓國 文化史論
○金時<업0x6A2D> : 麗元間文學交流에 對하여-高麗後期 士大夫文學의 形成과 對元關係-韓國漢文學硏究會 主催 第3回韓國漢文學 學術會議 (1980.12.22)發表
○閔賢九 : 李齊賢의 政治活動-恭愍王代를 中心으로-震檀學會 主催 第9回 韓國古典硏究심포지움-益齋集의 綜合的 檢討-(1981.3.14)發表
○鄭永福 : 李齊賢의 歷史意識 同上
◇著述·作品 關係 文獻
○鄭炳昱 : <력0x5D61>翁稗說 韓國의 名著 1969.9.9.15 玄岩社
○辛鎬烈 : 李齊賢 益齋集 新東亞 1969年 1月號 別冊附錄 韓國의 古典百選
○李相報 : <력0x5D61>翁稗說 韓國名著大全集 1972.10.15 大洋書籍
○鄭炳昱 : <력0x5D61>翁稗說·益齋亂藁 韓國의 大思想全集 5 1972.11.5 同和出版社
○任重彬 : <력0x5D61>翁稗說 精選韓國古典文學全集 6隨筆評論 Ⅱ1978.12.5
○張德順 : <解題> 益齋集 民族文化 5 1979.12.30 民族文化推進會
○張德順 : 李齊賢과 <력0x5D61>翁稗說 韓國隨筆文學史 8 隨筆文學 45 1976.2
○崔信浩 : 「<력0x5D61>翁稗說」의 장르 問題 1981.3.14 震檀學會 主催 第9回 韓國古典硏究심포해움-益齋集의 綜合的 檢討-1981.3.14 發表
◇ 詞·小樂府 關係 文獻
○徐鏡普 : 益齋詞 小考 靑兵大學論文集 3 1960.11
○徐首生 : 高麗歌謠의 硏究-特히 小樂府에 限하여-慶北大學校論文集 5 1962.2
○李種燦 : 小樂府 試攷 東岳語文論集 1 1965.1.19
○蕭繼宗 : 李益齋의 詞에 關하여-李益齋와 그의 詞가 韓國文學에 끼친 貢獻을 論함 東洋學 2 1972.12.25
○李佑成 : 高麗末期의 小樂府 韓國漢文學硏究 1 1976.8.25
○池榮在 : 益齋 長短句의 硏究 檀國大大學院 碩士論文 1977.6
○_ : 益齋 長短句의 成立 〔檀國大〕中國文學報 4 1980.1.30
○朴魯春 : 益齋小樂府와 及庵小樂府 〔慶熙大〕慶熙文選 4 1979.12.5
○_ : 高麗의 두 小樂府-益齋小樂府와 及庵小樂府 국어국문학 84 1980.10.15
○_ : 鮮于# 와 그의 「西湖曲」에 대하여 蘭汀南廣祐博士華甲紀念論叢 1980
◇ 著述(作品)飜譯
○<력0x5D61>翁稗說
李相寶 譯 韓國名著大全集 大洋書籍 1972.10.15 初版
權泰益 譯 韓國의 思想大全集 5 同和出版公社 1972.11.5 初版
任重彬 譯 精選韓國古典文學全集 6曺榮出版社 1978.12.5 初版
張德順 譯 韓國古隨筆選 三星文化文庫 143 1980.7.15 初版
○益齋亂藁
權五惇 譯 韓國의 思想大全集 5 同和出版公社 1972.11.5 初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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