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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 고서(한국본)
소장분관 : 도서관
기타분류기호 : MF35-1223
서명 / 저자 : 素雅堂叢書/ [編者未詳]
판사항 : 寫本
발행사항 : [ ]: [ ], [寫年未詳]
형태사항 : 線裝, 不分卷 3冊: 四周雙邊, 半郭 16.8 × 12.2cm, 烏絲欄, 半葉 10行 22字, 註雙行, 上黑魚尾; 24.7 × 16.8cm
일반주기 : 書名 : 表題에 依함
紙質 : 楮紙
내용주기 : 第1冊(心觀錄). 日本地誌 韓日
복제주기 : 마이크로필름.
마이크로필름 릴 ; 35 mm
소장본주기 : 印 : 李王家圖書之章
청구기호 : K2-4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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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부가정보

地理類-總志類-素雅堂叢書
「朝鮮王朝實錄」肅宗 45年(己亥, 1719) 4月 癸丑條에 通信正使 洪致中, 副使 黃 준% ,從 事官 李明彦 등을 日本에 使臣으로 보내는 內容의 記錄이 보이고, 같은 條에 對馬島主와 書契를 改定하여 締結해야 된다는 記錄이 있다. 本 「素雅堂叢書」의 第1冊(天部)의 後部에 朝鮮國王이 日本國大君에게 보내는 國書가 있는데 그 내용에는 康熙 58年(1719) 4月 11日이란 國書作成日이 역시 記載되어 있다.
위의 「王朝實錄」의 內容과 아래 「素雅堂叢書」에 收錄된 두 國書를 對照해보면 洪致中 등이 1719년 4월 11일에 作成된 朝鮮王의 書翰을 지니고 日本으로 出發하여 中途에서 大馬島主를 만나서 書契의 改正件을 論議하고, 다시 日本으로 가서 同年 10月 11日자로 作成된 日本國王의 答書를 받아서 돌아온 것이 분명한 사실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이들 使行의 往還紀行交이 틀림이 없겠으나 단지 一行中 누구의 손에 의하여 執筆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못하다. 이 紀行文의 敍述方法을 살펴보아도 三使臣·三使以下등으로 記錄되고 있기 때문에 執筆者가 누구였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使行의 一般例에서는 書狀官이 記錄을 擔當했고 또 本文中에는 庚子年(1720)初七日에 釜山에 還到하였다는 記錄이 밑에 入謁使臣이란 구절이 보이는데 이 말은 執筆者가 들어가서 사신을 뵈옵고의 뜻이라면 三使는 직접 글을 기록하지는 않았다는 증거가 되겠다. 따라서 素雅堂은 이 때에 同行한 書狀官의 號인 듯하다.
어쨌든 이 紀行文은 當時 交隣의 範疇內에 있던 日本國으로 가는 使臣이라면 누구나 須知할 事項, 즉 旅程에 따른 次序와 隘路, 禮節, 遵法, 風俗등을 後人에게 認知시키려는 目的으로 敍述된 것은 틀림이 없다. 第二冊과 三冊은 明·靑·元의 文士들이 그들 국내의 名勝地를 詠物한 詩를 抄錄한 것인데, 하필이면 明·靑·元의 國內에 있는 名勝地·古刹·樓臺등의 詩를 그것도 그 나라의 사람들이 지은 것만 골라서 抄錄한 것은 아마도 이것 역시 交隣에 必要한 資料를 募集한다는 意圖가 內包된 듯하다. 當時 使臣들은 國史問題의 專對 이외에도 宴會나 觀光을 통해서 兩國의 文士들이 詩賦를 통한 交流 또한 輕視될 수 없었기 때문에 평소에 이들 交隣國의 유명한 詩句의 知識은 사전에 익혀둘 필요가 있다고 여겨졌기에 日本의 紀行文과 함께 合冊된 듯하다.
天·地·人의 分冊으로 構成된 이 筆寫本에는 序跋文, 目次 등은 없고, 본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天部 第一冊(心觀錄)>
우리나라 使臣이 日本을 往還하는 紀行文으로서 佐須浦에 到着을 起點으로 記錄이 始作된다. 敍述方法을 살펴보면 어떤 浦를 단위로 하여 該當浦에 도착되면 우선 그 浦의 位置와 環境, 樹木의 種類, <군0x584B>船停泊의 雜易, 男女服飾, 使臣을 接待하는 飮食 及儀式 등의 生活狀이 기록되고, 마지막으로 이 浦를 出發하여 다음 浦까지의 船路에 대한 距離와 辛苦狀이 記錄된다. 左項浦에서 豊浦까지의 船路記錄을 例示해 본다.
몇일을 머물고는 길을 떠났다. 南風에 돛을 높이자 물결은 솟구치고 배는 날렵하다. 앞에는 引導하는 倭船 10여척이 늘어섰는데 사람들은 용감하여 行船이 민첩하다. 30리를 快行하여 鰐浦를 지나니 巨石이 列立하고 있다. 水中에 起伏된 그 모습이 마치 고래나 범의 이빨과도 같은데 파도가 부디칠 때에 뿜어내는 포말은 雪山과 흡사하다. 배가 그 속으로 통과하는데 자칫 잘못하여 勢를 빼앗기는 날에는 가루가 될 판이다. 옛날 우리나라 譯官 韓天錫이 이 곳에서 침몰했다. 배마다 돛을 다스리고 引導倭船이 左右로 날개처럼 나뉘어서 바위를 피하면서 회전하는데 尺寸을 다투는 험로인지라 櫓질이 매우 어렵다. 드디어 豊浦에 碇泊하다.
以上과 같은 敍述方法으로 豊浦·西泊浦·船頭港을 航海하는 記錄이 있고, 對馬島州(別名 : 芳津)에 到着되어서는 보다 仔細한 記錄이 보이는데 주로 그들의 生活모습에 대한 것과, 官民關係, 我國使臣을 迎送하는 節次 등이 敍述되어 있다. 그 내용 중에서 환송장면을 기록한 몇 구절을 소개해 보면 아래와 같다.
使臣이 起居하는 館에 제공된 물품들은 진귀한 것은 없었다. 6월에는 黃白菊花 1盆이 보내왔는데 花色이 매우 아름답다 竹筒에 물을 채우고 蘭草 몇 그루를 꽂았는데 잎이 길고 꽃은 細微한 것이 향이 좋다…(中略) 일행은 馬島를 출발하여 國書를 받들고 儀式을 갖추어 滂口를 나간다. 이 때에 長老이하 奉行·裁判은 각각 배를 소유하고, 記室·禁徒·通事 등 묻 倭人들의 환송인원은 약 천명이고, 大小舟船이 백여척이며, 衣粮등의 什物은 만여개나 되었다…(中略) 백여척의 護衛船에는 靑·黃·紅色의 깃발을 세워 三使臣이 탄 배의 船上에 꽂힌 깃발의 色과 맞추게 하였다. 色을 보면 正使와 副使가 어느 배에 타고 있는지를 알아서 類대로 따르게 하였다. 前路의 各州에서도 모두 그렇게 하였다.
對馬島에서 480여리에 風本浦(一名 勝本)가 있고 그 다음에는 藍島가 있는데 이 남도에서는 使行의 迎接이 對馬島보다 몇 곱절이나 좋았다는 記錄이 보인다.
(前略)… 太守의 姓名은 源宣政이며 太守의 食俸은 5십 2만石이다. …(中略) 三使行을 接待하는데 1일에 제공되는 닭은 3백여수 계란이 2천여개, 여타의 물품은 이와 걸맞게 하였으며, 이런 것들은 백성에게서 걷은 것이 아니고 公府에서 지출되어 처리된 것이라고 한다.
이 紀行文은 무엇보다도 日本의 關白을 만나 國書를 傳하고 答書를 받아오는 記錄이 核心이다. 藍島를 出發한 使行은 福岡의 10리쯤밖에 있는 博多津(지까다)를 지나면서 感懷에 젖는다. 新羅忠信 朴堤上이 이곳에서 死節했고, 高麗의 鄭圃隱도 奉使길에 이 곳에서 被留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江戶까지 가는 데에는 많은 날짜를 소모하고, 또 많은 곳을 거치게 되는데 經路를 대략 살펴보면, 地島(一名 慈島), 長門州, 赤關, 鎌刈(一名 浦<기0x597C>), <도0x5BD3>浦, 牛窓, 大板城(攝津州)을 거쳐 倭京인 太和에 도착된다. 이곳에 대한 記錄으로는 國都의 來歷, 位置, 魚<염0x6AA9>. 財貨, 租稅, 政治體制 및 構造, 軍政, 關白의 號令範圍, 各官爵들의 食封, 祭禮儀式, 法律 등이 敍述되어 있다.
使行은 太和에서 各州의 長들이 集合한 公式的인 迎接을 받고 釜士山을 觀光한 뒤에 江湖에 到着되는데 이 때는 이미 9月도 끝나는 시기였음을 몇일 뒤이 日字記錄에서 알 수 있다.
江戶에서는 雄壯한 宮城이 바라보이는 實相寺에 使館이 定해지는데 數千間이 넘는 이 절의 構造가 詳細하게 記述되어 있다. 이 곳에서 비로소 關白이 보낸 執政을 相接하는데 關白을 代身한 致賀의 말과 아울러 10월 1일에 我國의 國書가 傳達되고, 5일에는 馬才를 試觀하고, 9일에는 馬守家에서 宴會, 11일에는 回答書를 받게 되고, 13일에 다시 設宴, 15일에 回程이라는 日定을 關白으로부터 傳達받는 記錄이 보인다.
關白을 接見하는 禮義는 壬戌年例와 같다는 事前連絡을 받고 있는데 그 때의 儀式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이번 行事의 記錄울 參考하면 짐작이 가능하겠다. 關白을 相面하는 날의 節次를 記述한 原文을 살펴본다.
드디어 國書를 받는 三使臣은 모두 金冠玉佩의 朝服으로 笏을 잡고, 우리나라의 轎(가마의 일종)를 탔으며, 製述官과 세 사람의 堂譯, 通事는 黑團領을 입고 懸轎를 탔다. 書記, 醫官 역시 黑團領에 帽帶차림, 軍官은 羽笠, 錦袍, 佩<일0x6F3B>으로 모두 金鞍駿馬를 타고, 期<모0x6088> 節<술0x67CD>의 기발과 鼓吹管絃을 약쪽에서 연주하면서 隊伍를 이루어 나아갔다. 第一城門에 들어서니 구경하는 男女들이 잠박의 누에처럼 가득한데 모두 비단을 입었다. 第二城門을 통과하니 하늘높이 솟은 기와집이 천여채나 늘어섰는데 길게 둘려진 담장에는 흰칠을 하였으며, 집집마다 門前에 세운 깃발이 마치 宮關처럼 儼然하다.…(中略)이 집들은 모두 執政, 太守등 여러 貴人들의 가옥이다. 第三門에 이르니 여기가 바로 宮垣인데 城은 있어도 壕塹이나 砲樓는 없고 制度가 화려하기로는 흡사 우리나라의 官墻 같으면서도 훨씬 高大하다. 軍官이하는 宮城門 밖에서 下馬와 동시에 武裝을 풀고 步行으로 들어가고 깃발도 내리고 鼓吹도 멈추어 뒤따르게 했다. 한 문에 도착하여 堂譯이하는 또 下轎하여 步行, 다시 한 문에 이르러서는 使臣이 下轎했다. 馬州太守, 湛長老, 菖長老, 兩館伴 및 橫田備, 中守가 門內에서 맞이하여 前導에 들어가는 대로 여러 上官이 따랐다. 또 한 문에 도착하여 首譯官이 國書를 받들어 龍亭에 얹어 두 손으로 받쳐들고 들어가고 使臣이 뒤따랐다. 門內에 丁字形의 높은 집이 있다. 木版으로 된 계단을 오르니 閣道와 통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소위 玄闕이다. 그 위에는 紅衣·烏帽 跣足(종아리를 들어낸 赤脚)차림의 7∼8사람이 인도하는대로 閣道를 따라 들어가니 大廳이 있었다. 卓上에 國書를 安置하고 使臣과 馬守, 長老들이 東西로 나누어 순서대로 앉아있었다. 조금 뒤에 소위 大目付라는 倭館이 나와서 안으로 들라는 의미를 馬守가 首譯에게 전하자 首譯이 國書를 받들고 앞서고 3使가 따랐다. 한正廳에 도착, 다시 卓上에 國書를 安置했는데 여기가 바로 關白이 앉아있는 殿과는 벽 하나를 격해 있는 곳이었다. 各州의 太守와 高官들이 公服차림과 跣足으로 숲처럼 모여 있다. 使臣은 東向으로 앉고, 馬守는 南向으로 꿇어 앉는다. 조금 뒤에 首執政인 源正岑이 馬守를 불러서 무어라고 지시하니, 首譯이 다시 國書를 받들고 殿聞에 이르러서 꿇어 앉아서 馬守에게 傳하고 馬守도 꿇어 앉아 받아서 殿內로 들어가서 執事에게 傳達 執事가 받들어서 關白의 자리앞에 놓았다. 드디어 公禮幣物이 殿의 椽外에 陳設되었다. …(中略) 국서가 전해지자 使臣이 들어가서 關白에게 절하고 나왔다가 다시 들어가서 酒禮를 마치고 나왔다. 이때에 모든 上官이 차례로 들어갔다. 三堂譯은 楹內에서 절하고, 製述官·軍官·書記는 楹外에서 절하고, 諸軍官·醫官·書畵官도 楹外에서, 次官·小童은 退廳에서, 中下官은 庭下에서 모두 4번 절하고 물러났다.
關白은 머리에 一角烏帽를 쓰고 옅은 淡靑泡를 입었으며 重茵(다다미) 위에 앉았고, 책상·의자 등은 없었다. …(中略) 左右에는 珠簾과 採惟가 설치되었으나 殿內는 넓지 않았다. 關白의 위인이 대체로 예리하고 수척하면서도 굳세어 보이고 얼굴이 깨끗하면서 길죽하고 엷은 황색에 흰 편이나 풍부하지는 못하다. 紅衣 몇 사람이 곁에 俯伏해 있는 것 이외에는 殿門左右에 儀狀이나 兵衡 등은 세우지 않았다. 宮室은 정교하면서도 廣闊高壯한 景觀은 없고 네모의 기둥에는 그림이 그려있지 않았다.…(中略) 首執政이 關白의 命을 使臣에게 전했는데 곧 宗臣에게 宴禮를 代行케 했으니 마음대로 잡수시길 원합니다고 했다. 使臣들이 다시 들어가서 하직예를 행하고 나왔다. 드디어 宴席에 나갔다.…(下略)
위의 原文에서 소위 宗臣은 紀伊中納言인 源宗直, 水戶中將인 源宗堯, 尾長中納言인 源繼友인데 이 3人이 執政의 윗 자리에 있으며 宗室의 最貴位에 있고, 이들은 모두 나이 어린 乳臭의 弱冠인데도 3人中 繼友는 食俸이 61만 9천石, 宗職은 55만 5천石, 宗堯는 35만石이라는 記錄이 보인다.
關白이 回答書는 執政 2人이 가지고 오는데 역시 儀仗 등의 備御는 없고, 館門에 도착하여 馬守가 書<궤0x589B>를 받들고, 두 執政이 따랐으며, 使臣이하 모두 黑團領차림으로 楹外에 나가서 맞이하여 받는 節次가 상세하게 記述되어 있다. 그리고 이 回答書는 붉은 칠의 木<궤0x5891>안에 다시 純銀<궤0x5891>를 넣고 그 속에 비단褓로 싸서 넣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일행은 己亥年(1719) 4월에 출발하여 9월 27일에 江戶에 도착, 18일을 머물고 10월 11일에 回答書를 받아 10월 15일자로 回程에 오른다.
回程도중의 事件으로서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12월 28일자에 우리 譯官中 權興植이 飮毒自殺했다는 기록인데 이유는 江戶에 있을 때에 裝物을 搜索 당했는데 이 사람의 行李 속에 人蔘 12斤, 銀子 1천 1백50兩, 황금 24兩이 적발되었기 때문에 즉석에서 구속되었다. 馬州에 이르면 處斷될 入場에 놓이자 스스로 자살했다는 것이다.
日本法에 使臣 이하 종사관이 人蔘이나 金銀을 密輸했을 때에 犯量이 十兩 이상이면 直爲處斷이라는 기록도 함께 보인다.
回程途中에 庚子年(1720) 正月 初一日을 당하여는 三使臣이 새벽에 船上에 酒肉을 陳設해놓고 望闕禮를 行하고, 初 7日에 釜山에 還到되고 24일에 漢江을 건너 三使臣 이하 차례로 京城에 들어가서 復命하는 것이 紀行文에 大尾이다.
紀行文에 末尾에 朝鮮王이 보내는 國書의 內容과, 日本에서 보낸 回答書의 內容이 記錄되어 있고, 그 다음에는 東萊에서 倭京江戶에까지의 路程이 있으며, 마지막에는 通信士行의 人員(員額)이 記錄되어 있다.
<地部 第二冊, 人部 第三冊>
두 권 모두 明·靑·元·金의 文人들의 時를 筆寫한 것인데 詩題는 주로 樓·臺·宮·觀·寺刹·橋梁을 읊은 것이 많다.
이 책의 第一冊은 18세기 초엽 우리나라의 交隣關係를 硏究하는데 貴重한 資料이며, 특히 당시 日本의 文化와 政治體制, 官制를 硏究하려면 須知할 만한 事項들이 많이 收錄된 드물게 仔詳한 紀行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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