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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 고서(한국본)
소장분관 : 도서관
기타분류기호 : MF35-1883
서명 / 저자 :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 編者未詳
판사항 : 木版
발행사항 : [ ]: [ ], 刊年未詳
형태사항 : 線裝1冊(34張): 四周雙邊, 半郭 19.5 × 16.3cm, 有界, 半葉 10行 18字, 註雙行, 上二葉花紋魚尾; 33.6 × 22cm
일반주기 : 紙質 : 楮紙
내용주기 : 內容 : 鄭寒岡과 張旅軒이 師弟間이 아니라는 辨破記錄임
복제주기 : 마이크로필름.
마이크로필름 릴 ; 35 mm
소장본주기 : 印 : 李王家圖書之章
청구기호 : K2-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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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부가정보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

김학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Ⅰ. 서지적 고찰

장서각도서번호 2-905
仁同張氏南山派編(推定).
註雙行. 花葉紋魚尾. 19.5x16.3cm.
印 : 李王家圖書之章.
紙質 : 楮紙.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은 『寒岡先生言行錄』의 일부 내용을 張顯光側의 입장에서 辨破한 冊으로서 鄭逑(1543-1620, 寒岡, 淸州人)와 張顯光(1554-1637, 旅軒, 仁同人)의 사제관계 여부를 두고 발생한 이른바 寒旅是非1)의 일단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본서는 不分卷 1冊(34張)의 木板本으로 四周雙邊, 有界, 10行 18字이다. 표제는 『寒旅辨硫錄』이고, 판심은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이다. 본서는 현재 藏書閣(2-905) 외에 韓國精神文化硏究院(c2-142)에도 所藏되어 있다.

Ⅱ. 편찬배경

1. 편저자

본서는 편찬의 주체, 연대, 경위를 알려주는 序跋文이 없기 때문에 편저자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다만 한 개인의 단독적인 편찬이기보다는 旅軒 張顯光의 후손인 仁同張氏 南山派의 공의에 의해 共撰된 것으로 보인다.

2. 편찬연도

본서의 編纂時期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정확한 연대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본서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할 때, 적어도 19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본서에는 『寒岡言行錄』의 校勘與否를 두고 李象靖이 누차 거론되고 있으며, 거기에 따른 李象靖後孫들의 書簡도 수록되어 있다. 李象靖이 거론된 것은 그의 사후 校勘事實의 여부를 두고 일어났기 때문에 李象靖(1711∼1781, 號 大山, 韓山人)의 생졸년을 고려할 때, 본서는 기본적으로 19세기 이후에 편찬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편, 陶山書院에서 守藏하고 있는 通文 중에는 바로 이 『寒岡言行錄』과 관련하여 張顯光側에서 鄭逑側의 부당성을 설파한 通文이 있다.2)
이 通文이 발통된 시기는 1898년(光武 2, 成戌)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단서의 편찬시기는 1900년을 전후한 시기 내지는 그 이후까지도 상정할 수 있다.

3, 편찬목적

本書는 『寒岡言行錄』 중 張顯光과 관계된 일부 조항을 辨正하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鄭逑와 張顯光의 師弟說을 부정하는데 있다. 鄭逑와 張顯光의 師弟關係 여부에 따른 논란은 17세기 중엽 이후 後孫과 門人들 사이에서 줄기차게 진행되어 왔다. 肅
宗 연간 鄭逑의 門人錄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차적인 논란이 있은 이래, 그 후의 논란은 이의 연장선상에서 있어 왔다.
朝鮮後期 嶺南學派는 李滉의 弟子 또는 再傳弟子를 둘러싸고 수많은 시비와 논란이 있어 왔다. 柳成龍과 趙穆의 是非(厓月是非),3) 金誠一과 柳成龍을 둘러싼 是非(所謂 屛虎是非),4) 鄭逑와 金宇<옹0x6BCB>을 둘러싼 是非(兩岡是非)5) 등이 바로 그러한 예에 속한다.
본 寒旅是非도 위 언급한 시비들 못지 않게 영남학파 내부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대 사건이라 할 만하다. 위 是非들이 주로 상호 우위권 다툼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면, 본 寒旅是非는 師承關係를 둘러싼 淵源是非였다는 점에서 또다른 특징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본 是非는 조선후기 星州·仁同一帶 사림들의 동향을 파악함에 있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참고적으로 본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寒岡言行錄』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기로 하겠다.
『寒岡言行錄』은 제목 그대로 鄭逑의 言行錄이다. 여타의 언행록이 모두 그러하듯이 『寒岡言行錄』도 제자들의 箚記를 토대로 편찬되었다.
맨 앞에 수록된 「寒岡先生言行錄箚記弟子目錄」을 통해서 볼 때, 본 『寒岡言行錄』은 徐思遠(1550∼1632, 樂齋, 違城人), 孫處訥(1553∼1634, 慕堂, 密陽人), 文緯(1555∼1632, 某溪, 南平人), 郭(01)근, 李厚慶(1558∼1630, 畏齋, 碧珍人), 崔恒慶(?-1638, 竹軒, 永川人), 張興孝
(1564∼1633, 敬堂, 安東人), 朴明胤, 李(02)사(1566∼1651, 東湖, 光州人), 李天封(1567∼1634, 白川, 星州人), 李潤雨(1569∼1634, 石潭, 廣州人), 李堉(1573∼1637, 心遠堂, 全州人), 金大澤, 裵尙龍(1574∼1655, 藤庵, 星州人), 黃宗海(1579∼1642, 朽川, 懷德人), 李<학0x79C1>, 許穆(1595∼1682, 眉<수0x672A>, 陽川人) 등 모두 17명의 제자들의 箚記를 바탕으로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6)
본 『寒岡言行錄』은 모두 4卷의 체제로 되어 있다. 1권에는 學問, 讀書, 持敬, 資品, 律身, 成德, 禮學, 講辨, 敎人, 起居語默之節 등 10項目, 2卷에는 尊賢, 事親, 友愛, 居喪, 奉先, 居家, 飮食衣服之節, 交際, 威儀, 處鄕, 辭受 등 11項目, 3卷에는 出處, 忠義,居官, 著逑, 論時事,
處小人, 雜記, 考終記 등 8項目, 4卷에는敍逑, 實記, 遺事 등 11항목으로 되어 있다.
本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은 바로 『寒岡言行錄』의 내용 중 張顯光을 鄭逑와 師弟關係로 규정한 것에 대한 반발로서 張顯光과 관계된 『寒岡言行錄』의 일부 조목을 변파하는데 목적이 있다.
본서의 序文에 의하면, 鄭逑와 張顯光은 師弟關係가 아닌 것이 분명한데도 鄭逑側에서 『寒岡言行錄』을 간행하면서 張顯光을 諸子目錄에 首題로 기록하였으며, 張顯光이 지은 鄭逑 行狀의 일부 내용을 마치 張顯光의 차기처럼 변작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있기도 않은 宋俊吉의 筵說을 날조, 부기하면서까지 師弟關係의 근거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즉, 張顯光側의 입장은 張顯光이 鄭逑의 제자가 아님은 물론 『寒岡言行錄』에 첨부된 張顯光의 箚記는 行狀의 變作에 불과한 바, 『寒岡言行錄』은 鄭逑側의 독단에 의해 이루어진 杜撰이라는 것이다.
결국 本書는 鄭逑와 張顯光의 師弟關係를 부정하는데 근본적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비가 이른바 淵源是非로 지칭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III. 편찬체제와 내용

1. 체제

本書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不分卷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내용상 아래와 같이 세분될 수 있다.
* 序文(序文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내용상 序文에 해당한다)
* 『寒岡言行錄』의 구체적인 辨破部分
* 總論(編纂者)<附錄>
* 東洛通檜淵文(4件)
柬洛書院(張顯光 配享, 在仁同)에서 檜淵書院에 보낸 通文.* 張氏與鄭氏書(2件)
仁同張氏(張顯丹則)가 淸州鄭氏(鄭山則)에 보낸 書翰.
* 鄭氏答張氏書(1件)
淸州鄭氏(鄭逝則)가 仁同張氏(張顯光側)에 보낸 答書.
* 蘇湖李氏答張氏書(1件)
李象靖의 후손들이 張顯光의 후손들에게 보낸 書翰.
* 榮川士林通檜淵文(1件)
滎州士林들이 檜淵書院(鄭逑配享, 在星州)에 보낸 通文.
* 藏待士林答柬洛文(1件)
藏待書院(金光粹, 申元祿, 申꺼弟, 李民宬 配享, 在義城) 사림들이 東洛書院에 답한 글.
* 懷德崇賢士林通檜淵文(1件)
崇賢書院(鄭光弼, 金淨, 宋麟壽, 金長生, 宋浚吉, 宋時烈 配享, 在懷德) 士林들이 檜淵書院에 보낸 通文.
* 崇賢士林答東洛文(1件)
崇賢書院에서 下杖洛書院에 보낸 通文.

2. 내용

本書의 體制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데, 그 주안점은 역시 『寒岡言行錄』 가운데 張顯尤則에서 용인할 수 없는 일부 내용을 변파하는데 있다. 따라서 辨破의 주체는 仁同張氏를 중심으로 한 張顯光則이며, 辨破 대상은 鄭逑의 언행록인 『寒岡言行錄』이다. 본서에서는 모두12개 조항에 걸쳐 변파가 행해지고 있는네, 이제 각조의 변파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1) 箚言亡의 諸子目錄 중 張顯光을 首題로 한 사항
張顯光側 辨論:『寒岡言行錄』의 箚記目錄은 尸秋錄이나 다름없는데, 여기에 張顯光이 들어있다는 것은 곧 張顯光을 鄭逑의 문인으로 춰급하겠다는 의도와 다를 바 없다고 간주하면서 그 부당성을 아래와 같이 변론하고 있다.
* 張顯光이 지은 鄭逑의 祭文을 볼 때, 執經受業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 張顯光이 鄭逑의 行狀을 지으면서 그 말단에 貫鄕과 姓名만 기재했을 뿐이며, 輓詞에서도 姪壻로 칭했을 뿐 문인으로 자칭하지 않았다.
* 張顯光은 簡札 등에서 鄭逑를 '鄭忠州' '寒岡鄭令公' '鄭寒岡' 등 官銜이나 別號를 씀으로서 門人을 자처하지 않았다.
* 張顯光이 鄭逑의 喪에서 巾帶를 착용하지 않은 것은 張顯光 자신이 師弟間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근거이다.
* 正祖가 親製한 張顯光의 祭文에서, "淵源有自陶山退水爰轝寒岡契道同志라고 한 것에서도 나타나듯 鄭逑와는 사제관계일 수 없다.

(2) 諸子目錄과 箚記 諸條의 아래에 張顯光의 姓諱를 直書한 사항
張顯光側 辨論: 先賢에 대한 避諱는 尊賢의 禮인데, 張顯光이 鄭逑보다 年少임을 구실삼아 諸子目錄과 箚記 詞柒의 아래에 張顯光의 이름을 바로 쓴 것은 부당하다. 先賢으로서 道德이 서로 비등하고 공히 후학의 존경을 받는다면 나이에 구애받을 것이 없다. 더욱이 양인은 사제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退溪先生言行錄』에서 弟子 이름을 직서한 것에 비길 수 없는 바, 張顯光의 이름을 바로 쓰는(直書) 것은 부당하다.

(3) 張顯光이 지은 鄭逑의 孑刊犬을 抄節해서 箚錄으로 變作한 사항
張顯光f則論辨: 張顯光은 본래 鄭逑의 言行을 기록한 箚記가 없었는네, 鄭逑則에서 張顯光이 지은 鄭逑 행장을 抄節하여 箚記처럼 變作했다는 것이다. 先賢의 문자는 함부로 變易할 수 없으며, 특히 鄭逑와 같은 大賢의 행장을 바꾼다는 것은 부당한 처사로 비판하고 있다. 더욱이 鄭逑의 행장이 유포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鄭逑側에서 이를 變換한 본의는 張顯光을 門人에 편입하려는 의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4) 變作한 箚錄의 몇몇 字句의 刪改한 부분에 대한 사항
張顯光側 辦論: 鄭逑則은 行狀을 抄節하여 箚錄으로 變作하는 과정에서 張顯光이 지은 행장 본문의 몇몇 字句를 刪改한 부분을 제시하고 있다.
* 外曾祖 金宏弼과 관련한 부분에 대한 刪改處.
「行狀本文」 "盖先生生質之美 固自秀異 而原其家世之積 則節行文學之氣脈 實有所自來也 又寒喧堂 篤厚醇正之德 爲不斬之澤 其所以受其餘範者 無分內外之裔則流灌濡染於鄭氏之承襲者 豈亦尋常哉"
「刪改된 부분」 "(盖)先生生質之美 固自秀異 而原其家世之積 則節行文學之氣脈 實有所自來也 又寒喧堂 篤厚醇正之德 爲不斬之澤 其所以(受其餘範者 無分內外之裔則)流灌濡染(於鄭氏之承襲)者 豈亦尋常哉"
張顯光은 행장을 지으면서 鄭逑의 家學淵源을 外曾祖 金宏弼에 연결시켰으나, 위의 「刪改된 부분」에 의하면 張顯光의 본의가 상당히 약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五先生禮說分類』와 관련한 刪改處
「行狀本文」 "初據朱子家禮 遵行於一身一家 知其不可一日廢也 而究其大全 則有周公之儀禮 戴氏之禮記 乃其源流也 總之爲家綿阡口國 條之爲吉凶軍賓嘉 所以敍彛倫立儀則者 無不在是矣 殘缺雖多 可知類推而該之也又添之以歷代增損之制 質之以兩宋諸懦之論 則禮之本末於是于備矣 此五先生禮說 卽其晩年所輯而至於終身 留意焉者也 其所抄定者 有冠儀婚儀葬儀及契儀等件 而好禮者 今或做而行之 亦可以見先生之禮學矣"
「刪改된 부분」 "先生 初據朱子家禮 遵行於一身一家 知其不可一日廢也 而究其大全 (則有周公之儀禮 戴氏之禮記 乃其源流也一刪) 總之爲家綿阡b國 條之爲吉凶軍賓嘉 (所以敍彛倫立儀則者 無不在是矣 殘缺雖多 可知類推而該之也一刪) 又添之以歷代增損之制 質之以兩宋諸儒之論則禮之本末於是乎備矣 此五先生禮說 (卽其晩年所輯而一刪)終身留意焉者也 (其所抄定者 有冠儀婚儀葬儀及契儀等件而一刪)好禮之家 今或做而行之 亦可以見先生之禮學矣"
두 기록을 비교해 볼 매, 鄭逑의 禮學을 서술함에 있어 先儒의 영향을 의도적으로 배제합으로서 鄭逑를 지나치게 부각하러 했다는네 張顯光側의 反論의 요지가 있다.
* 鄭逑의 早夫父母한 사항에 관련한 刪改處
「行狀本文」 "自以早夫庭訓 爲永憾云云"
「刪改된 부분」 "先生(自以一刪)早失庭訓 爲永憾云云"
* 이의 鄭逑의 행실을 다룬 부분 중에서 약간의 무리가 있는 면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5) 宋浚吉의 筵說에 관련한 사항
張顯光側 辦論:『寒岡言行錄』의 부록에 기록된 宋浚吉의 筵說 즉 "스승인 鄭逑가 贈職되지 않았는데, 弟子인 張顯光을 먼저 증직하는 것은 事體가 온당하지 못하다"는 기록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鄭逑側은 宋浚吉의 '經筵日記', '宋7受吉家乘', '檜淵碑陰記', '尤庵與同春書' 등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지만 '經筵日記', '宋浚吉家乘'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檜淵碑陰記'에는 '筵臣의 건의로 (鄭逑가) 領議政에 추증되었다'는 기록만 있으며, '尤庵與同春書'에는 '鄭逑의 贈職은 宋浚吉이 特請했다'라는 기록만 있을 뿐 鄭逑와 張顯光의 師弟關係를 언급한 것은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張顯光側은 위의 언급이 宋浚吉과는 무관하다는 宋浚吉 本孫의 回信을 反論의 근거로 삼고 있다.

(6) 『寒岡言行錄』 舊本에는 張顯光의 箚記와 宋浚吉의 筵說이 없었다는 사항
張顯光側 辦論:『寒岡言行錄』 舊本에는 張顯光의 箚記와 宋浚吉의 筵說이 없었다고 반론하면서 洪氏家 所藏의 舊本7)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新刊本에서 張顯光의 淵源에 대해 특히 상세하게 다루고 있음을 볼 때, 兩人의 師弟關係를 부각하려는 의도에서 임의로 添入했을 혐의를 강하게 시시하고 있다.

(7) 仁穆大妃·永昌大君·金悌男에 관한 사항
張顯光側 辨論: 仁穆大妃의 幽閉는 1618年(光海 10), 永昌大君 殺害는 1614年(光海君 6), 金悌男의 被禍는 1613年(光海 5)으로 각기 年代를 달리하는네, 모두 1618年 戊午年의 일로 다루는 착오를 지적하고 있다. 이는 『寒岡年譜』와도 일치하지 않음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이 기록은 사제관계 여부와는 무관하지만 『寒岡言行錄』이 내용상 문제가 많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조처로 보인다.

(8) 이외 <金應礪의 見聞錄에 관한 사항>, <擬疏에 관한 사항>, <鄭逑가 본인 所撰의 禮說을 金生生과 더불어 서로 勸勉遵行했다는 사항>, <舊本에 비해 金字顆과의 관계를 貶下한 사항>, <箚記目錄에서 許穆을 가장 末端에 둔 사항>에 대한 張顯光側의 辨論이 있으나 寒旅是非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언급은 생략한다.
한편 부록 형식으로 첨부되어 있는 通文, 簡札은 張顯光側에서 鄭逑側에 是正을 촉구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외 李象靖의 後掛側에서 張顯光의 後孫側으로 보낸 <蘇湖李氏答張氏書>는 李象靖이 『寒岡言行錄』의 校勘을 맡았지만 곧 바로 사망함으로서 실질적인 校勘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건과 李象靖은 무관하다는 내용의 서찰이다.
그리고 <榮川士林通檜淵文>은 『寒岡言行錄』의 공정하지 못한 刊行에 대한 榮州士林들의 抗章이며, <藏待士林答東洛文>은 『寒岡言行錄』을 士林의 公儀에 따라 釐整하자는 내용이다.
한편, 宋浚吉의 緣故地인 懷德의 崇賢書院士林들은 檜淵書院과 東洛書院에 각각 1통씩 모두 2건의 通文을 발송하였다. 전자는 근거없이 宋浚吉의 筵說을 거론한데 대한 항의이며, 후자는 宋浚吉의 筵說은 사실무근임을 강조한 글이다.

IV. 자료적 가치

17세기 전반 星州一帶는 鄭逑와 張顯光에 의해 所謂 寒旅學派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李滉 이후 뚜렷한 學問的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던 安東圈을 대신하여 嶺南의 학문적 분위기를 주도해 갔다. 鄭逑와 張顯光은 師弟之間에 다를 바 없었으며, 婚脈으로도 연결되어 있었다.鄭逑는 張顯光의 妻叔으로 張顯光의 婚姻을 주관키도 하였다.8) 이들은 門人들 사이의 교류도 활발하여 두 문하를 동시에 출입한 인물이 많았다.9) 그러나 이들의 사후 師弟關係 여부에 따른 淵源是非를 양산하면서 알력을 빛고 말았다. 그 직접적인 빌미가 된 것은 許穆이었다.
1675年(肅宗1) 肅宗은 許穆을 右議政에 임명하고 후속 조처로서 學問의 淵源을 闡揚하기 위하여 成均館에 命하여 즉시 鄭逑의 門人錄을 修正케 하였다.l0) 이에 成均館에서는 서둘러 張顯光을 首題로 그 이하7 0여명을 大略 記錄하여 奉進하였으나 肅宗은 可否를 지적하지도 않고 퇴각하는 조처를 거듭하였다.11) 당황한 成均館에서는 당시 領議政으로 있던 許積의 조언에 의해 許穆을 首題로 年次에 의거 張顯光을 7번째로 題名하여 봉진하자 그제야 肅宗이 嘉納하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다.12)
결국 肅宗이 鄭逑의 門人錄을 修正케 한 목적은 許穆을 首弟子로 인정하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13) 이는 다분히 政治的인 의도가 내포된 것이었다. 鄭逑의 門人錄인 『檜淵及門錄』14)과 『記言』에 수록된 허목의 「年譜」에15) 의거할 때, 許穆이 鄭逑의 門人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許穆이 鄭逑의 輓詞에서 밝히고 있듯이 世代 차이로 인하여 사실상 師弟間의 교류가 이루어질 겨를이 없었다.16) 단지 許穆은 鄭逑의 死後 墓誌銘을 撰하고 『寒岡集』의 序文을 지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許穆이 鄭逑의 首弟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許穆의 門人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제기되고 있었다.
李萬敷(1664∼1732, 息山, 延安人)는 許穆의 年譜 편찬 과정에서 자신의 從祖 李鳳徵(眉<수0x672A>門人)에게 許穆의 鄭逑 弟子說에 대해 많은 의문을 제기했다. 李萬敷에 의하면, 許穆은 鄭逑를 일시 방문한 이후 學問에 관한 질문이 없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師弟間으로 보기 어려운 면을 지적하였다.17) 따라서 許穆의 學問을 오로지 鄭逑에서 出自한다고 한다면, 이는 근거없는 논의로서 後世의 嫌疑를 면하기 어렵다고 우려하었다.18) 나아가 李萬敷는, 許穆의 鄭逑 受學說은 비록 온 세상에 전해지고 있지만 양인의 학문에는 상이한 면이 많기 때문에 전해오는 말을 믿기 어렵다고 보았다.19) 다만 許穆이 先儒들 중에서 鄭逑를 가장 존경하였고, 또 遺事를 짓는 과정에서 鄭逑의 道學을 극찬하였기 때문에 受學說(弟子說)로 訛傳된 것으로 본 것이다.20)
결국 「眉<수0x672A>年譜」는 편찬 과정에서 일찍이 肅宗에 의해 인정받기도 한 鄭逑의 首弟子로서의 인식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다분하였지만 일각에서의 우려와 반대에 부딪혀 당초의 의도가 관철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眉<수0x672A>年譜」에는 이만부가 지적했던 대목들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다만 從兄 許厚(觀雪軒)와 함께 鄭逑를 師事한 정도로만 기록되어 있다.21}
年齒上 許穆은 張顯光에 비하여 41年下였으며 張顯光의 門人이기도 했다.22) 그런데 許穆이 鄭逑의 수제자가 되고 張顯光이 許穆보다 하위에 題名됨으로서 張顯光측에서 볼 때, 이는 許穆에게 見屈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에 張顯光側에서는 許穆의 하위에 등재되느니 차라리 張顯光의 鄭逑 門人說을 원천적으로 부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이다.23) 마침 檜淵書院에서 鄭逑의 문인록을 수정하자 張顯光側에서는 張顯光을 門人錄에서 뺄 것을 요구하여 일시 관철되기도 하였다.24)
그러나 裵正徽(1645∼1709, 孤村, 寒岡門人)에 의해 張顯光이 다시 입록되면서25) 갈등은 표면화되었다.
이에 張顯光의 孫子 張金永(1622∼1705, 訴梅堂, 高靈縣監)은 星州牧에 呈狀하여 張顯光이 鄭逑의 문인이라는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게 된다. 張顯光은 鄭逑를 경모하여 왕래는 많았지만 執經受業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門人으로 자처한 적이 없었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26) 그리고 이런 사실은 張顯光이 평소의 簡札과 祭文에서 姪壻로 칭한 점과 鄭逑가 張顯光을 門人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27) 즉 張顯光은 鄭逑의 질서에 불과하며, 門人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 年少者(裵正徽를 指稱一筆者)가 衆論을 저버리고 억지로 기록한 것을 바로잡아 줄 것을 陳情한 것이다.28) 그리고 이는 곧 鄭逑側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이 사건은 정구측에서 볼때 許穆에게 굴복되는 것을 꺼려한 張顯光側의 반감 표출로 평가되기도 했지만,29) 이 과정에서 星州一帶의 士論에 적지 않은 동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檜淵書院長이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고 동요의 기색을 보이면서30) 鄕校의 首任과 함께 辭職한 사실은31) 이를 잘 대변한다. 시종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寒旅學派도 이른바 淵源是非를 유발하면서 갈등의 국면을 맞았던 것이다. 본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은 위에서 언급한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寒旅學派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본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은 鄭逑와 張顯光의 사후 양측의 내부적 갈등상을 조명하는데 적지 않은 시사가 된다.

주) -----------------
1) 寒旅是非란 鄭逑와 張顯光의 師弟關係 與否에 대한 양측의 논란으로서 양인의 사후인 17세기 후반에 배태된 이래 수백년 동안 지속된 이른바 淵源是非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江守五夫, 「兩班支配の構造と歷史的變遷」 (『韓國兩班同族の硏究』, 第一書房, 1982); 鄭逑, 『寒岡全書』 「檜淵及門諸賢錄」 <凡例>; 裵正徽, 『孤村集』; 張<벽0x6299> 『訴梅堂集』; 退溪學硏究所, 『陶山書院古文書』 「通文」條 등이 참고된다. 그림 AA Ⅱ-1 p.126
2) 退溪學硏究所, 『陶山書院古文書』I 通文 23(壇國大 退溪學硏究所, 1994) 參照.
3) 徐廷文, 「退溪集의 初刊과 月川·西厓是非」 『北岳史論』3(國民大 國史學科, 1993).
4) 병호시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申奭鎬, 「屛虎是非に就いて」(上) 『靑丘學叢』 1.
申奭鎬, 「屛虎是非に就いて」(下) 『靑丘學叢』 3.
金鶴洙, 「葛庵 李玄逸 硏究-經世論과 學統關係를 中心으로-」(韓國精神文化硏究院 碩士學位論文, 1996).
5) 所謂 兩岡是非에 대해서는,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古文書集成』 25(德川書院篇) 참조.
6) 본 解題에서 참고한 『寒岡言行錄』은 1978년 景仁文化社에서 간행한 『寒岡全書』(上·下)이다. 본 『寒岡全書』에 수록된 『寒岡言行錄』의 弟子箚記目錄에는 張顯光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7) 洪氏家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沙洞 洪氏家라고만 기록되어 있고 柬岡 金字顆의 本孫이 洪氏家 所藏의 舊本을 얻어보았다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지역적으로는 星州 인근으로 보인다.
8) 七年己卯 先生二十六歲 聘夫人淸州鄭氏 行親迎禮 夫人贈判書适之女時判書公巳歿 季父寒岡先生 主其禮"(『旅軒全書』「年譜」 卷一).
9) 『檜淵及門諸賢綠』(寒岡全書 所載)과 『旅軒先生及門弟子錄』(旅軒全書 所載)을 비교해 보면 兩門下를 동시에 출입한 인물은 모두 53名으로 나타난다.
10) 肅宗以眉<수0x672A>許穆爲右議政 欲闡揚其淵源之正 遂下敎太學曰 卽日修正鄭寒岡門 人錄以來(『寒岡全書』 「檜淵及門錄」<凡例>).
11) 大學草草略記七十餘賢 以旅軒爲首題奉敎 肅宗無指摘可否而退却 又精寫奉敎 又退却(『寒岡全書』 「檜淵及門錄」<凡例>).
12) 大學惶恐 問于時領相 許積曰 吾意以眉<수0x672A>相公爲首題 則可合上意 太學更以首題眉曳次書旅軒於第七位(年次)以進 上曰可"(『寒岡全書』「檜淵及門錄」<凡例>).
13) 이에 대해서는 鄭逑의 子孫들이 肅宗에게 張顯光을 鄭逑의 門人錄에 入錄하는 것을 인정해 줄 것을 請願하였으나, 숙종이 이를 기각했다는 견해도 있다(江守五夫,「兩班支配の構造と歷史的燮遷」 『韓國兩班同族の硏究』,第一書房,1982).
14) 行錄曰 公早遊先生門 ...作先生文集序 撰先生壙銘 有言行手錄一條" (『寒岡全書』 「檜淵及門錄」 卷四 <許穆>).
15) 丁巳 從議政公于居昌任所...與從兄觀雪先生 往謁寒岡鄭先生于星州師事之"(『記言』 「年譜」 卷一).
16) 世與我而相違 終未展夫素志"(『記言』 「別集」 卷十三 <寒岡鄭先生挽詞>).
17) 謹案先生 覲其先考縣監公任所 歷訪寒岡 其後更無所質問之事 有不可以師弟言者"(『息山集』 卷三 <答上雪軒從大父 別紙>).
18) "先生之於寒岡 一見契合 雖與他人酬酌不同 然 若謂先生之學 盡出於寒岡 則恐致後人之疑 似非據實之論 未知如何"(『息山集』 卷三 <答上雪軒從大父別紙>).
19) 眉<수0x672A>之學於寒岡 擧世所傳之說也 然 其無問業質疑之事 豈以其學爲盡出寒岡乎 竊觀兩先生之學 頗不同 玆未信傳者之言耳(『息山集』 卷三 <答上雪軒從大父>).
20) 湄<수0x672A>於先輩 最尊寒岡 十錤遺事 極其斤導 具凡言語 必擧以爲重云 學之說由此而稱之于 未可知笑(『息山集』 卷三 <答上雪軒從大父>).
21) 丁巳 從議政公于居昌任所...與從兄觀雪先生 住謁寒岡鄭先生于星州師事之(『記言』 「年譜」卷一).
22) 1917년에 편찬된 旅軒先生及門諸賢錄에는 許穆을 首弟子로 그 이하 모두 350餘名이 題名되어 있다. 허목을 首題한 경위에 대해 편찬자는 세주에서 按東國文獻錄 公居先生門首題 故依此首題라 하여 東國文獻錄에 의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23) 衛率公 於是乎 有呈星州牧使之狀 而以爲寧不入於岡門 不欲見屈於眉曳之下者也(『寒岡全書』「檜淵及門錄」 <凡例>).
24) 其後聚檜淵書院 修正門人錄之日 生以親病不得赴會...翌日進去 則修正已畢 將寫正本 而都有司則已去矣 取見其本 則旅軒先生不爲入錄 生問于會中 則以爲先生子孫家 不願入錄(『孤村集』 卷五 <通檜淵書院文>).
25) "生曰 先生之出入門下 乃是實事 未知不願入錄之意何在 而不可不入錄僉曰 不願入錄之意 誠不可知 此言甚當 其議歸一(『孤村集』 卷五 <通檜淵書院文>).
26) "伏以民之祖父文康公 於寒岡鄭先生 爲姪女壻也 往來頻數 敬慕雖勤 實無執經受業之事 故先祖未嘗以門人 自處"(『訴梅堂集』 卷一 <呈星州牧>).
27) "干日簡牘及祭文 每以娃壻稱之 鄭先生亦於相對時 稱以旅軒 未嘗以門人待之 此則國人先輩 親近出入於先祖門下者 莫不知之(『訴梅堂集』 卷一<呈星州牧>).
28) "今番鄭先生門人錄抄報時 聞以先祖混稱門下 民以爲鄕曲後生 不識兩家事蹟 言及其不可之意 而有一少年 排衆强書云 其謬妄甚矣 伏願城主 枚擧報使 伸無事實顚錯之患"(『訴梅堂集』 卷一 <呈星州牧>).
29) "衛率公 於是于 有呈星州牧使之狀 而以爲寧不入於岡門 不欲見屈於眉曳之下者也"(『寒岡全書』「檜淵及門錄」 <凡例> ).
30) "(張顯光)入錄之後 淵長枕吟面地而言曰 子孫之不願入錄 其意安在 旣巳不願 則今日之錄 果何如 金季鎭戱之曰 淵長又如此矣 初以入錄爲是 而更有致疑之言耶 淵長曰 吾則無分明說破之言矣"(『孤村集』 卷二 <通檜淵書院文>).
31) 伏以近以寒岡先生門人錄事 張高靈丈 旣己呈官陳卞 而檜淵鄕校首任 相繼投單(『孤村集』卷五 <通檜淵書院文>).

부가정보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

김학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Ⅰ. 서지적 고찰

장서각도서번호 2-905
仁同張氏南山派編(推定).
註雙行. 花葉紋魚尾. 19.5x16.3cm.
印 : 李王家圖書之章.
紙質 : 楮紙.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은 『寒岡先生言行錄』의 일부 내용을 張顯光側의 입장에서 辨破한 冊으로서 鄭逑(1543-1620, 寒岡, 淸州人)와 張顯光(1554-1637, 旅軒, 仁同人)의 사제관계 여부를 두고 발생한 이른바 寒旅是非1)의 일단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본서는 不分卷 1冊(34張)의 木板本으로 四周雙邊, 有界, 10行 18字이다. 표제는 『寒旅辨硫錄』이고, 판심은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이다. 본서는 현재 藏書閣(2-905) 외에 韓國精神文化硏究院(c2-142)에도 所藏되어 있다.

Ⅱ. 편찬배경

1. 편저자

본서는 편찬의 주체, 연대, 경위를 알려주는 序跋文이 없기 때문에 편저자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다만 한 개인의 단독적인 편찬이기보다는 旅軒 張顯光의 후손인 仁同張氏 南山派의 공의에 의해 共撰된 것으로 보인다.

2. 편찬연도

본서의 編纂時期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어 정확한 연대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본서에 수록된 내용을 토대로 할 때, 적어도 19세기 이후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본서에는 『寒岡言行錄』의 校勘與否를 두고 李象靖이 누차 거론되고 있으며, 거기에 따른 李象靖後孫들의 書簡도 수록되어 있다. 李象靖이 거론된 것은 그의 사후 校勘事實의 여부를 두고 일어났기 때문에 李象靖(1711∼1781, 號 大山, 韓山人)의 생졸년을 고려할 때, 본서는 기본적으로 19세기 이후에 편찬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한편, 陶山書院에서 守藏하고 있는 通文 중에는 바로 이 『寒岡言行錄』과 관련하여 張顯光側에서 鄭逑側의 부당성을 설파한 通文이 있다.2)
이 通文이 발통된 시기는 1898년(光武 2, 成戌)이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단서의 편찬시기는 1900년을 전후한 시기 내지는 그 이후까지도 상정할 수 있다.

3, 편찬목적

本書는 『寒岡言行錄』 중 張顯光과 관계된 일부 조항을 辨正하는데 일차적인 목적이 있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鄭逑와 張顯光의 師弟說을 부정하는데 있다. 鄭逑와 張顯光의 師弟關係 여부에 따른 논란은 17세기 중엽 이후 後孫과 門人들 사이에서 줄기차게 진행되어 왔다. 肅
宗 연간 鄭逑의 門人錄을 만드는 과정에서 일차적인 논란이 있은 이래, 그 후의 논란은 이의 연장선상에서 있어 왔다.
朝鮮後期 嶺南學派는 李滉의 弟子 또는 再傳弟子를 둘러싸고 수많은 시비와 논란이 있어 왔다. 柳成龍과 趙穆의 是非(厓月是非),3) 金誠一과 柳成龍을 둘러싼 是非(所謂 屛虎是非),4) 鄭逑와 金宇<옹0x6BCB>을 둘러싼 是非(兩岡是非)5) 등이 바로 그러한 예에 속한다.
본 寒旅是非도 위 언급한 시비들 못지 않게 영남학파 내부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일대 사건이라 할 만하다. 위 是非들이 주로 상호 우위권 다툼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면, 본 寒旅是非는 師承關係를 둘러싼 淵源是非였다는 점에서 또다른 특징이 있는 것이다. 아울러 본 是非는 조선후기 星州·仁同一帶 사림들의 동향을 파악함에 있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참고적으로 본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寒岡言行錄』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기로 하겠다.
『寒岡言行錄』은 제목 그대로 鄭逑의 言行錄이다. 여타의 언행록이 모두 그러하듯이 『寒岡言行錄』도 제자들의 箚記를 토대로 편찬되었다.
맨 앞에 수록된 「寒岡先生言行錄箚記弟子目錄」을 통해서 볼 때, 본 『寒岡言行錄』은 徐思遠(1550∼1632, 樂齋, 違城人), 孫處訥(1553∼1634, 慕堂, 密陽人), 文緯(1555∼1632, 某溪, 南平人), 郭(01)근, 李厚慶(1558∼1630, 畏齋, 碧珍人), 崔恒慶(?-1638, 竹軒, 永川人), 張興孝
(1564∼1633, 敬堂, 安東人), 朴明胤, 李(02)사(1566∼1651, 東湖, 光州人), 李天封(1567∼1634, 白川, 星州人), 李潤雨(1569∼1634, 石潭, 廣州人), 李堉(1573∼1637, 心遠堂, 全州人), 金大澤, 裵尙龍(1574∼1655, 藤庵, 星州人), 黃宗海(1579∼1642, 朽川, 懷德人), 李<학0x79C1>, 許穆(1595∼1682, 眉<수0x672A>, 陽川人) 등 모두 17명의 제자들의 箚記를 바탕으로 편찬되었음을 알 수 있다.6)
본 『寒岡言行錄』은 모두 4卷의 체제로 되어 있다. 1권에는 學問, 讀書, 持敬, 資品, 律身, 成德, 禮學, 講辨, 敎人, 起居語默之節 등 10項目, 2卷에는 尊賢, 事親, 友愛, 居喪, 奉先, 居家, 飮食衣服之節, 交際, 威儀, 處鄕, 辭受 등 11項目, 3卷에는 出處, 忠義,居官, 著逑, 論時事,
處小人, 雜記, 考終記 등 8項目, 4卷에는敍逑, 實記, 遺事 등 11항목으로 되어 있다.
本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은 바로 『寒岡言行錄』의 내용 중 張顯光을 鄭逑와 師弟關係로 규정한 것에 대한 반발로서 張顯光과 관계된 『寒岡言行錄』의 일부 조목을 변파하는데 목적이 있다.
본서의 序文에 의하면, 鄭逑와 張顯光은 師弟關係가 아닌 것이 분명한데도 鄭逑側에서 『寒岡言行錄』을 간행하면서 張顯光을 諸子目錄에 首題로 기록하였으며, 張顯光이 지은 鄭逑 行狀의 일부 내용을 마치 張顯光의 차기처럼 변작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있기도 않은 宋俊吉의 筵說을 날조, 부기하면서까지 師弟關係의 근거로 제시했다는 것이다.
즉, 張顯光側의 입장은 張顯光이 鄭逑의 제자가 아님은 물론 『寒岡言行錄』에 첨부된 張顯光의 箚記는 行狀의 變作에 불과한 바, 『寒岡言行錄』은 鄭逑側의 독단에 의해 이루어진 杜撰이라는 것이다.
결국 本書는 鄭逑와 張顯光의 師弟關係를 부정하는데 근본적인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비가 이른바 淵源是非로 지칭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III. 편찬체제와 내용

1. 체제

本書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不分卷 1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내용상 아래와 같이 세분될 수 있다.
* 序文(序文으로 명시하지는 않았으나 내용상 序文에 해당한다)
* 『寒岡言行錄』의 구체적인 辨破部分
* 總論(編纂者)<附錄>
* 東洛通檜淵文(4件)
柬洛書院(張顯光 配享, 在仁同)에서 檜淵書院에 보낸 通文.* 張氏與鄭氏書(2件)
仁同張氏(張顯丹則)가 淸州鄭氏(鄭山則)에 보낸 書翰.
* 鄭氏答張氏書(1件)
淸州鄭氏(鄭逝則)가 仁同張氏(張顯光側)에 보낸 答書.
* 蘇湖李氏答張氏書(1件)
李象靖의 후손들이 張顯光의 후손들에게 보낸 書翰.
* 榮川士林通檜淵文(1件)
滎州士林들이 檜淵書院(鄭逑配享, 在星州)에 보낸 通文.
* 藏待士林答柬洛文(1件)
藏待書院(金光粹, 申元祿, 申꺼弟, 李民宬 配享, 在義城) 사림들이 東洛書院에 답한 글.
* 懷德崇賢士林通檜淵文(1件)
崇賢書院(鄭光弼, 金淨, 宋麟壽, 金長生, 宋浚吉, 宋時烈 配享, 在懷德) 士林들이 檜淵書院에 보낸 通文.
* 崇賢士林答東洛文(1件)
崇賢書院에서 下杖洛書院에 보낸 通文.

2. 내용

本書의 體制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은데, 그 주안점은 역시 『寒岡言行錄』 가운데 張顯尤則에서 용인할 수 없는 일부 내용을 변파하는데 있다. 따라서 辨破의 주체는 仁同張氏를 중심으로 한 張顯光則이며, 辨破 대상은 鄭逑의 언행록인 『寒岡言行錄』이다. 본서에서는 모두12개 조항에 걸쳐 변파가 행해지고 있는네, 이제 각조의 변파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1) 箚言亡의 諸子目錄 중 張顯光을 首題로 한 사항
張顯光側 辨論:『寒岡言行錄』의 箚記目錄은 尸秋錄이나 다름없는데, 여기에 張顯光이 들어있다는 것은 곧 張顯光을 鄭逑의 문인으로 춰급하겠다는 의도와 다를 바 없다고 간주하면서 그 부당성을 아래와 같이 변론하고 있다.
* 張顯光이 지은 鄭逑의 祭文을 볼 때, 執經受業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 張顯光이 鄭逑의 行狀을 지으면서 그 말단에 貫鄕과 姓名만 기재했을 뿐이며, 輓詞에서도 姪壻로 칭했을 뿐 문인으로 자칭하지 않았다.
* 張顯光은 簡札 등에서 鄭逑를 '鄭忠州' '寒岡鄭令公' '鄭寒岡' 등 官銜이나 別號를 씀으로서 門人을 자처하지 않았다.
* 張顯光이 鄭逑의 喪에서 巾帶를 착용하지 않은 것은 張顯光 자신이 師弟間으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분명한 근거이다.
* 正祖가 親製한 張顯光의 祭文에서, "淵源有自陶山退水爰轝寒岡契道同志라고 한 것에서도 나타나듯 鄭逑와는 사제관계일 수 없다.

(2) 諸子目錄과 箚記 諸條의 아래에 張顯光의 姓諱를 直書한 사항
張顯光側 辨論: 先賢에 대한 避諱는 尊賢의 禮인데, 張顯光이 鄭逑보다 年少임을 구실삼아 諸子目錄과 箚記 詞柒의 아래에 張顯光의 이름을 바로 쓴 것은 부당하다. 先賢으로서 道德이 서로 비등하고 공히 후학의 존경을 받는다면 나이에 구애받을 것이 없다. 더욱이 양인은 사제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退溪先生言行錄』에서 弟子 이름을 직서한 것에 비길 수 없는 바, 張顯光의 이름을 바로 쓰는(直書) 것은 부당하다.

(3) 張顯光이 지은 鄭逑의 孑刊犬을 抄節해서 箚錄으로 變作한 사항
張顯光f則論辨: 張顯光은 본래 鄭逑의 言行을 기록한 箚記가 없었는네, 鄭逑則에서 張顯光이 지은 鄭逑 행장을 抄節하여 箚記처럼 變作했다는 것이다. 先賢의 문자는 함부로 變易할 수 없으며, 특히 鄭逑와 같은 大賢의 행장을 바꾼다는 것은 부당한 처사로 비판하고 있다. 더욱이 鄭逑의 행장이 유포된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鄭逑側에서 이를 變換한 본의는 張顯光을 門人에 편입하려는 의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4) 變作한 箚錄의 몇몇 字句의 刪改한 부분에 대한 사항
張顯光側 辦論: 鄭逑則은 行狀을 抄節하여 箚錄으로 變作하는 과정에서 張顯光이 지은 행장 본문의 몇몇 字句를 刪改한 부분을 제시하고 있다.
* 外曾祖 金宏弼과 관련한 부분에 대한 刪改處.
「行狀本文」 "盖先生生質之美 固自秀異 而原其家世之積 則節行文學之氣脈 實有所自來也 又寒喧堂 篤厚醇正之德 爲不斬之澤 其所以受其餘範者 無分內外之裔則流灌濡染於鄭氏之承襲者 豈亦尋常哉"
「刪改된 부분」 "(盖)先生生質之美 固自秀異 而原其家世之積 則節行文學之氣脈 實有所自來也 又寒喧堂 篤厚醇正之德 爲不斬之澤 其所以(受其餘範者 無分內外之裔則)流灌濡染(於鄭氏之承襲)者 豈亦尋常哉"
張顯光은 행장을 지으면서 鄭逑의 家學淵源을 外曾祖 金宏弼에 연결시켰으나, 위의 「刪改된 부분」에 의하면 張顯光의 본의가 상당히 약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 『五先生禮說分類』와 관련한 刪改處
「行狀本文」 "初據朱子家禮 遵行於一身一家 知其不可一日廢也 而究其大全 則有周公之儀禮 戴氏之禮記 乃其源流也 總之爲家綿阡口國 條之爲吉凶軍賓嘉 所以敍彛倫立儀則者 無不在是矣 殘缺雖多 可知類推而該之也又添之以歷代增損之制 質之以兩宋諸懦之論 則禮之本末於是于備矣 此五先生禮說 卽其晩年所輯而至於終身 留意焉者也 其所抄定者 有冠儀婚儀葬儀及契儀等件 而好禮者 今或做而行之 亦可以見先生之禮學矣"
「刪改된 부분」 "先生 初據朱子家禮 遵行於一身一家 知其不可一日廢也 而究其大全 (則有周公之儀禮 戴氏之禮記 乃其源流也一刪) 總之爲家綿阡b國 條之爲吉凶軍賓嘉 (所以敍彛倫立儀則者 無不在是矣 殘缺雖多 可知類推而該之也一刪) 又添之以歷代增損之制 質之以兩宋諸儒之論則禮之本末於是乎備矣 此五先生禮說 (卽其晩年所輯而一刪)終身留意焉者也 (其所抄定者 有冠儀婚儀葬儀及契儀等件而一刪)好禮之家 今或做而行之 亦可以見先生之禮學矣"
두 기록을 비교해 볼 매, 鄭逑의 禮學을 서술함에 있어 先儒의 영향을 의도적으로 배제합으로서 鄭逑를 지나치게 부각하러 했다는네 張顯光側의 反論의 요지가 있다.
* 鄭逑의 早夫父母한 사항에 관련한 刪改處
「行狀本文」 "自以早夫庭訓 爲永憾云云"
「刪改된 부분」 "先生(自以一刪)早失庭訓 爲永憾云云"
* 이의 鄭逑의 행실을 다룬 부분 중에서 약간의 무리가 있는 면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5) 宋浚吉의 筵說에 관련한 사항
張顯光側 辦論:『寒岡言行錄』의 부록에 기록된 宋浚吉의 筵說 즉 "스승인 鄭逑가 贈職되지 않았는데, 弟子인 張顯光을 먼저 증직하는 것은 事體가 온당하지 못하다"는 기록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 鄭逑側은 宋浚吉의 '經筵日記', '宋7受吉家乘', '檜淵碑陰記', '尤庵與同春書' 등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지만 '經筵日記', '宋浚吉家乘'에는 이러한 기록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檜淵碑陰記'에는 '筵臣의 건의로 (鄭逑가) 領議政에 추증되었다'는 기록만 있으며, '尤庵與同春書'에는 '鄭逑의 贈職은 宋浚吉이 特請했다'라는 기록만 있을 뿐 鄭逑와 張顯光의 師弟關係를 언급한 것은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 張顯光側은 위의 언급이 宋浚吉과는 무관하다는 宋浚吉 本孫의 回信을 反論의 근거로 삼고 있다.

(6) 『寒岡言行錄』 舊本에는 張顯光의 箚記와 宋浚吉의 筵說이 없었다는 사항
張顯光側 辦論:『寒岡言行錄』 舊本에는 張顯光의 箚記와 宋浚吉의 筵說이 없었다고 반론하면서 洪氏家 所藏의 舊本7)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新刊本에서 張顯光의 淵源에 대해 특히 상세하게 다루고 있음을 볼 때, 兩人의 師弟關係를 부각하려는 의도에서 임의로 添入했을 혐의를 강하게 시시하고 있다.

(7) 仁穆大妃·永昌大君·金悌男에 관한 사항
張顯光側 辨論: 仁穆大妃의 幽閉는 1618年(光海 10), 永昌大君 殺害는 1614年(光海君 6), 金悌男의 被禍는 1613年(光海 5)으로 각기 年代를 달리하는네, 모두 1618年 戊午年의 일로 다루는 착오를 지적하고 있다. 이는 『寒岡年譜』와도 일치하지 않음을 아울러 지적하고 있다. 이 기록은 사제관계 여부와는 무관하지만 『寒岡言行錄』이 내용상 문제가 많다는 점을 부각하기 위한 조처로 보인다.

(8) 이외 <金應礪의 見聞錄에 관한 사항>, <擬疏에 관한 사항>, <鄭逑가 본인 所撰의 禮說을 金生生과 더불어 서로 勸勉遵行했다는 사항>, <舊本에 비해 金字顆과의 관계를 貶下한 사항>, <箚記目錄에서 許穆을 가장 末端에 둔 사항>에 대한 張顯光側의 辨論이 있으나 寒旅是非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언급은 생략한다.
한편 부록 형식으로 첨부되어 있는 通文, 簡札은 張顯光側에서 鄭逑側에 是正을 촉구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외 李象靖의 後掛側에서 張顯光의 後孫側으로 보낸 <蘇湖李氏答張氏書>는 李象靖이 『寒岡言行錄』의 校勘을 맡았지만 곧 바로 사망함으로서 실질적인 校勘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건과 李象靖은 무관하다는 내용의 서찰이다.
그리고 <榮川士林通檜淵文>은 『寒岡言行錄』의 공정하지 못한 刊行에 대한 榮州士林들의 抗章이며, <藏待士林答東洛文>은 『寒岡言行錄』을 士林의 公儀에 따라 釐整하자는 내용이다.
한편, 宋浚吉의 緣故地인 懷德의 崇賢書院士林들은 檜淵書院과 東洛書院에 각각 1통씩 모두 2건의 通文을 발송하였다. 전자는 근거없이 宋浚吉의 筵說을 거론한데 대한 항의이며, 후자는 宋浚吉의 筵說은 사실무근임을 강조한 글이다.

IV. 자료적 가치

17세기 전반 星州一帶는 鄭逑와 張顯光에 의해 所謂 寒旅學派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李滉 이후 뚜렷한 學問的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던 安東圈을 대신하여 嶺南의 학문적 분위기를 주도해 갔다. 鄭逑와 張顯光은 師弟之間에 다를 바 없었으며, 婚脈으로도 연결되어 있었다.鄭逑는 張顯光의 妻叔으로 張顯光의 婚姻을 주관키도 하였다.8) 이들은 門人들 사이의 교류도 활발하여 두 문하를 동시에 출입한 인물이 많았다.9) 그러나 이들의 사후 師弟關係 여부에 따른 淵源是非를 양산하면서 알력을 빛고 말았다. 그 직접적인 빌미가 된 것은 許穆이었다.
1675年(肅宗1) 肅宗은 許穆을 右議政에 임명하고 후속 조처로서 學問의 淵源을 闡揚하기 위하여 成均館에 命하여 즉시 鄭逑의 門人錄을 修正케 하였다.l0) 이에 成均館에서는 서둘러 張顯光을 首題로 그 이하7 0여명을 大略 記錄하여 奉進하였으나 肅宗은 可否를 지적하지도 않고 퇴각하는 조처를 거듭하였다.11) 당황한 成均館에서는 당시 領議政으로 있던 許積의 조언에 의해 許穆을 首題로 年次에 의거 張顯光을 7번째로 題名하여 봉진하자 그제야 肅宗이 嘉納하는 일련의 과정이 있었다.12)
결국 肅宗이 鄭逑의 門人錄을 修正케 한 목적은 許穆을 首弟子로 인정하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13) 이는 다분히 政治的인 의도가 내포된 것이었다. 鄭逑의 門人錄인 『檜淵及門錄』14)과 『記言』에 수록된 허목의 「年譜」에15) 의거할 때, 許穆이 鄭逑의 門人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許穆이 鄭逑의 輓詞에서 밝히고 있듯이 世代 차이로 인하여 사실상 師弟間의 교류가 이루어질 겨를이 없었다.16) 단지 許穆은 鄭逑의 死後 墓誌銘을 撰하고 『寒岡集』의 序文을 지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許穆이 鄭逑의 首弟子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논란의 소지가 있었다. 여기에 대해서는 許穆의 門人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제기되고 있었다.
李萬敷(1664∼1732, 息山, 延安人)는 許穆의 年譜 편찬 과정에서 자신의 從祖 李鳳徵(眉<수0x672A>門人)에게 許穆의 鄭逑 弟子說에 대해 많은 의문을 제기했다. 李萬敷에 의하면, 許穆은 鄭逑를 일시 방문한 이후 學問에 관한 질문이 없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師弟間으로 보기 어려운 면을 지적하였다.17) 따라서 許穆의 學問을 오로지 鄭逑에서 出自한다고 한다면, 이는 근거없는 논의로서 後世의 嫌疑를 면하기 어렵다고 우려하었다.18) 나아가 李萬敷는, 許穆의 鄭逑 受學說은 비록 온 세상에 전해지고 있지만 양인의 학문에는 상이한 면이 많기 때문에 전해오는 말을 믿기 어렵다고 보았다.19) 다만 許穆이 先儒들 중에서 鄭逑를 가장 존경하였고, 또 遺事를 짓는 과정에서 鄭逑의 道學을 극찬하였기 때문에 受學說(弟子說)로 訛傳된 것으로 본 것이다.20)
결국 「眉<수0x672A>年譜」는 편찬 과정에서 일찍이 肅宗에 의해 인정받기도 한 鄭逑의 首弟子로서의 인식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다분하였지만 일각에서의 우려와 반대에 부딪혀 당초의 의도가 관철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眉<수0x672A>年譜」에는 이만부가 지적했던 대목들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다만 從兄 許厚(觀雪軒)와 함께 鄭逑를 師事한 정도로만 기록되어 있다.21}
年齒上 許穆은 張顯光에 비하여 41年下였으며 張顯光의 門人이기도 했다.22) 그런데 許穆이 鄭逑의 수제자가 되고 張顯光이 許穆보다 하위에 題名됨으로서 張顯光측에서 볼 때, 이는 許穆에게 見屈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에 張顯光側에서는 許穆의 하위에 등재되느니 차라리 張顯光의 鄭逑 門人說을 원천적으로 부정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이다.23) 마침 檜淵書院에서 鄭逑의 문인록을 수정하자 張顯光側에서는 張顯光을 門人錄에서 뺄 것을 요구하여 일시 관철되기도 하였다.24)
그러나 裵正徽(1645∼1709, 孤村, 寒岡門人)에 의해 張顯光이 다시 입록되면서25) 갈등은 표면화되었다.
이에 張顯光의 孫子 張金永(1622∼1705, 訴梅堂, 高靈縣監)은 星州牧에 呈狀하여 張顯光이 鄭逑의 문인이라는 사실을 완강히 부인하게 된다. 張顯光은 鄭逑를 경모하여 왕래는 많았지만 執經受業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門人으로 자처한 적이 없었다고 강경하게 주장하였다.26) 그리고 이런 사실은 張顯光이 평소의 簡札과 祭文에서 姪壻로 칭한 점과 鄭逑가 張顯光을 門人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분명하다고 주장하였다.27) 즉 張顯光은 鄭逑의 질서에 불과하며, 門人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 年少者(裵正徽를 指稱一筆者)가 衆論을 저버리고 억지로 기록한 것을 바로잡아 줄 것을 陳情한 것이다.28) 그리고 이는 곧 鄭逑側과의 결별을 선언한 것에 다름 아니다.
결국 이 사건은 정구측에서 볼때 許穆에게 굴복되는 것을 꺼려한 張顯光側의 반감 표출로 평가되기도 했지만,29) 이 과정에서 星州一帶의 士論에 적지 않은 동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檜淵書院長이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지 못하고 동요의 기색을 보이면서30) 鄕校의 首任과 함께 辭職한 사실은31) 이를 잘 대변한다. 시종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寒旅學派도 이른바 淵源是非를 유발하면서 갈등의 국면을 맞았던 것이다. 본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은 위에서 언급한 사건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까지 寒旅學派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본 『寒岡先生言行錄謬條辨破錄』은 鄭逑와 張顯光의 사후 양측의 내부적 갈등상을 조명하는데 적지 않은 시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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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寒旅是非란 鄭逑와 張顯光의 師弟關係 與否에 대한 양측의 논란으로서 양인의 사후인 17세기 후반에 배태된 이래 수백년 동안 지속된 이른바 淵源是非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江守五夫, 「兩班支配の構造と歷史的變遷」 (『韓國兩班同族の硏究』, 第一書房, 1982); 鄭逑, 『寒岡全書』 「檜淵及門諸賢錄」 <凡例>; 裵正徽, 『孤村集』; 張<벽0x6299> 『訴梅堂集』; 退溪學硏究所, 『陶山書院古文書』 「通文」條 등이 참고된다. 그림 AA Ⅱ-1 p.126
2) 退溪學硏究所, 『陶山書院古文書』I 通文 23(壇國大 退溪學硏究所, 1994) 參照.
3) 徐廷文, 「退溪集의 初刊과 月川·西厓是非」 『北岳史論』3(國民大 國史學科, 1993).
4) 병호시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申奭鎬, 「屛虎是非に就いて」(上) 『靑丘學叢』 1.
申奭鎬, 「屛虎是非に就いて」(下) 『靑丘學叢』 3.
金鶴洙, 「葛庵 李玄逸 硏究-經世論과 學統關係를 中心으로-」(韓國精神文化硏究院 碩士學位論文, 1996).
5) 所謂 兩岡是非에 대해서는, 韓國精神文化硏究院, 『古文書集成』 25(德川書院篇) 참조.
6) 본 解題에서 참고한 『寒岡言行錄』은 1978년 景仁文化社에서 간행한 『寒岡全書』(上·下)이다. 본 『寒岡全書』에 수록된 『寒岡言行錄』의 弟子箚記目錄에는 張顯光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7) 洪氏家는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 지는 분명하지 않다. 沙洞 洪氏家라고만 기록되어 있고 柬岡 金字顆의 本孫이 洪氏家 所藏의 舊本을 얻어보았다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지역적으로는 星州 인근으로 보인다.
8) 七年己卯 先生二十六歲 聘夫人淸州鄭氏 行親迎禮 夫人贈判書适之女時判書公巳歿 季父寒岡先生 主其禮"(『旅軒全書』「年譜」 卷一).
9) 『檜淵及門諸賢綠』(寒岡全書 所載)과 『旅軒先生及門弟子錄』(旅軒全書 所載)을 비교해 보면 兩門下를 동시에 출입한 인물은 모두 53名으로 나타난다.
10) 肅宗以眉<수0x672A>許穆爲右議政 欲闡揚其淵源之正 遂下敎太學曰 卽日修正鄭寒岡門 人錄以來(『寒岡全書』 「檜淵及門錄」<凡例>).
11) 大學草草略記七十餘賢 以旅軒爲首題奉敎 肅宗無指摘可否而退却 又精寫奉敎 又退却(『寒岡全書』 「檜淵及門錄」<凡例>).
12) 大學惶恐 問于時領相 許積曰 吾意以眉<수0x672A>相公爲首題 則可合上意 太學更以首題眉曳次書旅軒於第七位(年次)以進 上曰可"(『寒岡全書』「檜淵及門錄」<凡例>).
13) 이에 대해서는 鄭逑의 子孫들이 肅宗에게 張顯光을 鄭逑의 門人錄에 入錄하는 것을 인정해 줄 것을 請願하였으나, 숙종이 이를 기각했다는 견해도 있다(江守五夫,「兩班支配の構造と歷史的燮遷」 『韓國兩班同族の硏究』,第一書房,1982).
14) 行錄曰 公早遊先生門 ...作先生文集序 撰先生壙銘 有言行手錄一條" (『寒岡全書』 「檜淵及門錄」 卷四 <許穆>).
15) 丁巳 從議政公于居昌任所...與從兄觀雪先生 往謁寒岡鄭先生于星州師事之"(『記言』 「年譜」 卷一).
16) 世與我而相違 終未展夫素志"(『記言』 「別集」 卷十三 <寒岡鄭先生挽詞>).
17) 謹案先生 覲其先考縣監公任所 歷訪寒岡 其後更無所質問之事 有不可以師弟言者"(『息山集』 卷三 <答上雪軒從大父 別紙>).
18) "先生之於寒岡 一見契合 雖與他人酬酌不同 然 若謂先生之學 盡出於寒岡 則恐致後人之疑 似非據實之論 未知如何"(『息山集』 卷三 <答上雪軒從大父別紙>).
19) 眉<수0x672A>之學於寒岡 擧世所傳之說也 然 其無問業質疑之事 豈以其學爲盡出寒岡乎 竊觀兩先生之學 頗不同 玆未信傳者之言耳(『息山集』 卷三 <答上雪軒從大父>).
20) 湄<수0x672A>於先輩 最尊寒岡 十錤遺事 極其斤導 具凡言語 必擧以爲重云 學之說由此而稱之于 未可知笑(『息山集』 卷三 <答上雪軒從大父>).
21) 丁巳 從議政公于居昌任所...與從兄觀雪先生 住謁寒岡鄭先生于星州師事之(『記言』 「年譜」卷一).
22) 1917년에 편찬된 旅軒先生及門諸賢錄에는 許穆을 首弟子로 그 이하 모두 350餘名이 題名되어 있다. 허목을 首題한 경위에 대해 편찬자는 세주에서 按東國文獻錄 公居先生門首題 故依此首題라 하여 東國文獻錄에 의거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23) 衛率公 於是乎 有呈星州牧使之狀 而以爲寧不入於岡門 不欲見屈於眉曳之下者也(『寒岡全書』「檜淵及門錄」 <凡例>).
24) 其後聚檜淵書院 修正門人錄之日 生以親病不得赴會...翌日進去 則修正已畢 將寫正本 而都有司則已去矣 取見其本 則旅軒先生不爲入錄 生問于會中 則以爲先生子孫家 不願入錄(『孤村集』 卷五 <通檜淵書院文>).
25) "生曰 先生之出入門下 乃是實事 未知不願入錄之意何在 而不可不入錄僉曰 不願入錄之意 誠不可知 此言甚當 其議歸一(『孤村集』 卷五 <通檜淵書院文>).
26) "伏以民之祖父文康公 於寒岡鄭先生 爲姪女壻也 往來頻數 敬慕雖勤 實無執經受業之事 故先祖未嘗以門人 自處"(『訴梅堂集』 卷一 <呈星州牧>).
27) "干日簡牘及祭文 每以娃壻稱之 鄭先生亦於相對時 稱以旅軒 未嘗以門人待之 此則國人先輩 親近出入於先祖門下者 莫不知之(『訴梅堂集』 卷一<呈星州牧>).
28) "今番鄭先生門人錄抄報時 聞以先祖混稱門下 民以爲鄕曲後生 不識兩家事蹟 言及其不可之意 而有一少年 排衆强書云 其謬妄甚矣 伏願城主 枚擧報使 伸無事實顚錯之患"(『訴梅堂集』 卷一 <呈星州牧>).
29) "衛率公 於是于 有呈星州牧使之狀 而以爲寧不入於岡門 不欲見屈於眉曳之下者也"(『寒岡全書』「檜淵及門錄」 <凡例> ).
30) "(張顯光)入錄之後 淵長枕吟面地而言曰 子孫之不願入錄 其意安在 旣巳不願 則今日之錄 果何如 金季鎭戱之曰 淵長又如此矣 初以入錄爲是 而更有致疑之言耶 淵長曰 吾則無分明說破之言矣"(『孤村集』 卷二 <通檜淵書院文>).
31) 伏以近以寒岡先生門人錄事 張高靈丈 旣己呈官陳卞 而檜淵鄕校首任 相繼投單(『孤村集』卷五 <通檜淵書院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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