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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 고서(한국본)
소장분관 : 도서관
기타분류기호 : MF35-331
서명 / 저자 : 坎流編 朴泰輔(朝鮮) 撰
개인저자 : 박태보 (조선), (1654-1689)
판사항 : 手稿本
발행사항 : [ ]: [ ]; 肅宗 12(1686) 寫
형태사항 : 線裝1冊(83張): 無郭, 無絲欄, 半葉 10行 22字, 無版心; 25.5 × 17.5cm
일반주기 : 紙質 : 楮紙
내용주기 : 內容 : 庚申(1680) 11月 22日 - 乙丑(1685) 4月初 10日까지의 朴泰輔手記
복제주기 : 마이크로필름.
마이크로필름 릴 ; 35 mm
소장본주기 : 印 : 潘南朴氏泰輔士元甲午己降乙卯生員丁巳壯元壬戍賜暇定齋散人之章, 藏書閣圖書印
청구기호 : K2-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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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부가정보

坎流編
朴天圭
朴泰輔(朝鮮, 1654-1689) 手稿本
肅宗 12(1686)寫 1冊(83張). 無郭, 無絲欄, 半葉 10行 22字. 無版心. 25.5 ×17.5 cm. 線裝.
卷末: 自壬戌2月 丙寅(1686) 10月 凡擬正言者 4, 持平 五.
印: 藏書閣圖書印. 潘南朴氏泰輔士元甲午以降乙卯生員丁巳壯元壬戌賜暇定齊散人之章
紙質:楮紙
內容: 庚申(1680) 11月 22日- 乙丑(1685) 4月 初 10日까지의 朴泰輔手記

本書의 著者 朴泰輔의 字는 士元, 號는 定齊散人, 本貫은 潘南이다. 孝宗 5年(1654) 判中樞府事 西溪 世堂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뒤에 叔父 世堂에게 入養, 肅宗 15年(1689)에 36歲를 一期로 卒하였다.
그의 祖父 參判 炡은 仁祖 反正功臣이며, 아버지 西溪는 穡經思辨錄老子注 등의 著書로 有名하다. 또 그는 生家로는 藥泉 南九萬의 養家로는 明齊 尹拯의 甥姪이고, 完南府院君 李厚源의 사위로서 趙持謙任泳등과 가장 友善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當時 少論系譜의 名門出身으로서 學文과 文學이 뛰어났고, 親兄인 白石 泰維와 함께 筆苑의 名家로도 손꼽힌다.
그의 詩文集인 定齊集에 실린, 南學鳴 撰 行狀에 依하여 그의 略歷을 살펴보면, 그는 肅宗 元年 22歲에 生員, 同王 3年 謁聖文科에 壯元으로 及第한 뒤, 典籍을 거쳐 禮曹佐郞 때 試官이 되어 出題를 잘못하였다는 南人一派의 彈劾을 받아 宣川에 流配되었다. 이듬해 半年만에 宥還, 同王 6年 弘文館 修撰을 거쳐, 이듬해 뽑혀서 賜暇讀書官이 되었고, 이어 校理가 되었으나, 其間 吏曹判書 李端夏와 淸城府院君 金錫胄를 論駁하고, 吳始壽의 賜死를 反對하여 當路者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에 朝廷에 容納되지 못하고 자주 罷斥을 當하였다. 마침내 同王 8年 겨울 伊川縣監에 出補, 同王 12年 봄 5年만에 罷還하여 다시 修撰兵曹佐郞吏曹佐郞 등을 歷任하고 同年 湖南御使로 나갔다 돌아와 應敎에 陞進하였으나, 곧 坡州牧使에 出輔, 同王 14年 봄 牛栗黜享 事件으로 引免 歸家하였다.
이상이 定齊 朴泰輔의 略歷이거니와, 특히 朴泰輔하면, 仁顯王后 閔氏의 廢黜에 反對하여 直諫 節死한 것으로 더 有名하다. 그가 坡州에서 引免 家居한지 月餘만에, 所謂 己巳換局으로 西人이 물러나고 南人이 執權한 뒤, 肅宗의 繼妃인 仁顯王后 廢黜事件이 發生하였다.
肅宗實錄에 보면 (肅宗) 十五年 己巳 五月 己亥 殺前應敎朴泰輔로 하여, 朴泰輔를 죽였다고 所謂 春秋筆法을 보여 주고 있거니와, 그는 王의 親鞫에 抗直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도 더욱 酷毒한 刑罰을 받아, 火烙, 壓膝 등 가진 惡刑으로 살점이 모두 허트러졌어도 精神이 맑아 끝까지 昏迷하지 않았다. 그래서 世人이 모두 그의 忠誠을 가엾이 여기고, 그의 節義를 장하게 여겨, 平素 그를 함부로 헐뜯던 사람까지도 모두 心腹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마침내는 珍島<천0x7518>棘의 歸養길에 올라 겨우 鷺梁津 六臣祠 곁에 이르러 路死하였다.(肅宗實錄補闕正誤卷之二十日一丁, 十五年 己巳 五月己亥條 參照)

<*도>本書는 定齊가 宣川에 流配되었다가 돌아와 庚申(肅宗 6年) 11月 22日 副修撰에 拜命한 때로부터, 丙寅(同王 12年)까지 약 7年동안의 手記이다. 그리고 本書는 定齊別集에 收錄되어 있긴 하나, 藏書閣 所藏의 本書는 寫本으로서, 定齊의 私印이 있는 親筆手稿本이므로 本書의 編成年代나 過
程은 論勿 肅宗 6年으로부터 同 12年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적어도 定齊가 節死하기 前에 이루어졌음이 틀림없다 하겠다.

本書는 이미 말하였듯이, 肅宗 6年으로부터 同 12年까지의 著者를 中心으로 다시 朝廷에서 있었던 일을 年月日順으로 기록한 居官日記인 바, 肅宗 8年 10月 定齊가 伊川縣監에 出輔, 5年 만에 罷還하기까지의 記錄은 朝廷에서 自身에 관하여 云謂된 事實만을 採取監錄하였기 때문에 內容이 매우 簡略하다.

어떻든, 本書는 朴定齊의 居官手記이므로, 그 內容紹介는 바로 定齊의 傳記一部를 紹介하는 것이 된다. 때문에 여기서는 그 重要한 內容 몇 가지만을 紹介하는데 그치기로 하겠다.
첫째, 肅宗元年(1675) 淸에서 先王 顯宗의 昇遐를 弔文하기 위하여 使臣을 보내왔는 바, 이 때는 南人의 執權時機여서 右相 吳始壽가 淸使의 <빈0x6483>接使가 되어 使臣을 맞았다. 이 때 淸使를 修行하였던 淸의 通官 張孝禮가 歸國도중 龍川에서 朝鮮側 譯官에게 하였다는 말이 문제가 되었다. 즉 張孝禮는 朝鮮譯官들에게 皇帝(淸)가 先國王(顯宗)이 오랜 痼疾을 가졌으면서도 事大하는 誠意가 변함이 없었고, 또 强臣에게 制御를 받아 자유롭지 못하였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特別히 異典을 베풀어 두 번씩이나 賜祭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아마 淸側은 당시 朝鮮政府의 政情을 探知하기 위하여 常例에 벗어나게 國喪을 두 번씩이나 特典을 베풀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어떻든 吳始壽는 淸使를 보내고 돌아와 이 말을 王에게 上奏하면서, 黃海監司 尹<계0x558C>도 張에게 이 말을 들었다고 添言하였다. 그러나 尹<계0x558C>는 두 차례나 上疏하여 自身은 듣지 못하였다고 辨明하다가 臺諫의 彈論을 받아 流配되었다. 이 때 西人側 人士들은 모두 지난날 顯宗朝에 當國하였던 西人을 <제0x71BF>陷하려고 吳始壽가 이 말(張孝禮의 말)을 造作한 것으로 여겼다 한다. 그 뒤 政局은 一變하여, 肅宗 6年(1680) 所謂 庚寅大黜陟이 이루어짐으로써, 南人이 失勢하고 西人이 執權하자, 吳始壽의 失脚은 물론 이것이 問題化 되었다. 그래서 이듬해 6月 마침내 吳는 賜되고, 關係 諸譯官들은 流配되었다. 이 때 定齊는 前任大臣인 吳의 加形에 反對하여 王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에 朝廷에 容納되지 못하였다.
다음은, 肅宗 7年(1681) 10月, 淸城府院君 金錫胄(肅宗의 外叔)가 오랫동안 文廟에 配享하여 오던 苟況馬融玉肅등 中國의 歷代 儒學者 9人의 瑕疵를 指摘하여 文廟에서 黜享할 것을 建議하였다. 이때 朝廷에서는 이 建議에 대한 朝野의 是非가 紛<운0x6CE7>하였던 바, 定齊는 愼重論을 펴 不當하다고 異義를 提起, 이에 反對하는 上疏를 올렸다. 또 이와 同時에 當時 現職 吏曹判書인 李端夏가 銓長의 職에 適合한 人物이 아님을 들어 論駁하였다,.
李端夏를 論駁한 이유는, 첫째 求媚上下하였다는 것이고, 둘째 <광0x5704>怯失守하였다는 두 가지였다. 당초, 仁顯王后 閔氏의 嘉禮를 마치고, 后의 父인 *陽府院君閔維重의 實職 仍任問題가 論難되었다. 原來 朝鮮王朝에 들어와서는 王室과 婚姻關係를 가지면, 卽 國舅나 駙馬는 그 人才의 賢能與否는 勿論하고 實職에 任命하지 않는 것이 制度化한 前例였다, 그런데, 閔維重을 兵曹判書에 계속 留任한다는 王의 下命이 내리자, 大臣과 三司가 모두 이에 反對하였다. 이 때, 大司憲으로 現任 憲府의 長官이던 李端夏가 하나의 折衷案으로, 閔을 兵判에서 解任하여 衆議에 따르고, 그 대신 革弊廳을 別設하여 閔을 그 堂上官에 任命할 것을 疏請하였다. 定齊는 李의 이와 같은 疏請은 李가 王과 國舅에게 上下로 아첨하는 것이라고 指摘 論駁한 것이다.
또, 肅宗卽位年(16740 李端夏는 顯宗의 行狀을 撰進하였다. 이때, 李가 王命을 받들어 禮議의 首末을 修正添補한 일이 있었다. 定齊는 이를 지적, 李가 <광0x5704>怯하여 本來의 自己 所信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論駁하고, 이와 같이, 上下로 아첨하고, <광0x5704>怯하여 所信이 없는 이가 銓長의 任에 適合한 人物이 못된다고 하였다. 이 일로 定齊는 王의 노여움을 사서 곧 罷職不敍되었다.
이밖에 經筵에서의 該博한 滑說과 餘他 細<쇄0x671F>한 事實을 이로 紹介하기 어려워 省略하기로 한다.

本書는 著者의 詩文集인 定齊集에 別集 卷之四와 卷之五로 上下 兩編에 나누어 收錄刊行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 紹介하는 藏書閣 所藏本은 定齊의 親筆로 씌어진 手稿本인 점과, 定齊集에 收錄된 別集本과는 內容에 若干의 差異가 있다는 점에서 注目을 끈다. 이런 點에서 本書는 藏書閣에만 所藏된 唯一本으로서 貴重한 價値가 있다고 하겠다.
첫째, 定齊는 學文과 文學 뿐만 아니라, 書藝에도 뛰어난 名筆家로서, 매우 流麗한 筆致로 씌어졌다. 보통 이런 類의 手記가 草書體로 남겨져 後學들이 보기에 難解한데, 本書는 行書體로 되어 있어 누구나 알아보기 쉽다. 그리고 10行 22字의 井間을 使用하였기 때문에 行間이 定齊하다. 이런 點으로 보아 자칫 後人의 謄寫本으로 잘못 보기도 쉬우나, 이는 定齊가 官職
에서 여러 차례 罷斥된 機會에 틈틈이 整理 精書한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 開勸 初頭의 本書 첫 장 右下方에 가로 5.5cm, 세로 5.3 cm 의 端雅한 小篆體의 方角印이 찍혀 있는 바 1行에 5字씩 6行으로 潘南朴氏 泰輔 士元 甲午以降乙卯生員 丁巳壯元 任成賜暇 定齊散人之章이라 한 30字는 定齊의 本館聲名字號生年大小登科와 賜暇한 해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本書가 定齊의 私印이 찍힌 手澤本임을 證明하여 주는 좋은 證據이다.
다음, 誤字의 訂正이나, 혹은 潤文에 의한 改書도 있고, 極히 드문 일이나, 완전히 周爻 削除한 部分도 있다. 訂正이나 改書의 境遇에는 本來의 誤書部分을 도려내고 다른 종이를 붙여 改書한 곳도 몇 곳 있으나, 대부분 本來보다 더 진한 濃墨으로 눌러 써서 改書한 곳이 많으며, 落字는 往往 行間에 小字로 夾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訂正改書의 痕迹은 後人의 傳寫本에서의 境遇와 比較할 때 本書가 著者의 親筆手稿本임을 確證하여 주기도 한다. 또 本書 中間部分의 一部分에 朱墨으로 批點이 찍혀 있는 바, 이는 定齊의 加點인지 後人의 加批인지 未詳하고 批點을 加한 意味도 알 수 없다.
끝으로 本書와 別集本과의 內容의 差異를 서로 對校하여 보면 定齊의 末年에 該當되는 記事, 卽 定齊가 伊川縣監에서 罷還한 뒤, 肅宗 12年(1686) 5月 湖南御使北評事 등에 任命된 前後 記事가 本書에는 없다. 아마 이는 뒤에 別集 編輯人이 收拾追加한 것으로 보인다. 또 本書에 收錄된 記事가 一部나마 別集本에서 漏落된 것은 그 漏落分의 內容으로 보아 또한 別集 編輯人의 才量으로 定齊의 行績과 切實하고 關係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部分을 削除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그 漏落分의 內容을 보면, 定齊의 從兄으로서 當時 吏曹參議에 在職하던 朴泰尙에 關한 記事가 大部分이다. 本來 定齊는 그의 從兄인 泰尙에게 關心이 있어서 記錄하여 놓았던 것이나, 그의 後孫들 立場에서 볼 때에는 그리 重要視할만한 記事가 아니므로 削除하였던 것이라고 보인다.

以上, 大略 살펴본 바와 같이 本書는 著者 朴定齊의 36歲란 짧은 生涯 가운데 겨우 56年 동안에 걸친 居官手記에 不過하다. 그러나, 當時는 西人과 南人의 角逐이 極에 達하여 換局이 거듭되던 때였고, 이런 틈을 타 西人이 다시 老少 兩論으로 分派되던 時期로서 本來 西人에 屬하였던 定齊는 그 內外族親이 모두 少論의 巨物級들이었으며 定齊 自身 또한 그의 親兄 泰維와 함께 少論側의 精銳로 先鋒將格이었다.
吳始壽의 賜死反對, 聖<무0x60EB>黜享反對 및 李端夏論駁 등 一連의 事件과 聯關하여 登場하는 當時 人物의 系譜와 그들의 紛<운0x6CE7>한 論議를 分析하여 보면, 바로 當時 政爭의 焦點과 老少 兩論의 分派過程을 생생하게 看破할 수 있게 하여 준다. 이러한 點에서 本書가 朝鮮王朝 後期의 政治史 乃至 黨爭史 硏究에 놓은 資料가 됨을 贅言할 必要가 없겠다. 특히 本來 少論側의 年少氣銳한 先鋒將으로서 李端夏論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國舅였던 閔維重의 任職에 反對하여 罷職不敍까지 當하였던 그가, 급기야 뒤에는 閔妃의 廢黜에 積極 反對하여 依然히 直諫 殉節한 일로 미루어 보더라도, 本書가 가지는 史料로서의 公正性을 充分히 認定되는 바이다. 간혹 一邊에만 치우치는 감을 느끼게 하는 餘他記錄들과는 比較하여 함께 말할 수 없는 良書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本書가 가지는 또 하나의 價値는 著者自身의 親筆 手稿本이란 點과 그의 私印찍힌 手澤本이라는 點에서 더욱 빛을 더한다고 하겠다.
<檀國大學校 講師>

부가정보

坎流編
朴天圭
朴泰輔(朝鮮, 1654-1689) 手稿本
肅宗 12(1686)寫 1冊(83張). 無郭, 無絲欄, 半葉 10行 22字. 無版心. 25.5 ×17.5 cm. 線裝.
卷末: 自壬戌2月 丙寅(1686) 10月 凡擬正言者 4, 持平 五.
印: 藏書閣圖書印. 潘南朴氏泰輔士元甲午以降乙卯生員丁巳壯元壬戌賜暇定齊散人之章
紙質:楮紙
內容: 庚申(1680) 11月 22日- 乙丑(1685) 4月 初 10日까지의 朴泰輔手記

本書의 著者 朴泰輔의 字는 士元, 號는 定齊散人, 本貫은 潘南이다. 孝宗 5年(1654) 判中樞府事 西溪 世堂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뒤에 叔父 世堂에게 入養, 肅宗 15年(1689)에 36歲를 一期로 卒하였다.
그의 祖父 參判 炡은 仁祖 反正功臣이며, 아버지 西溪는 穡經思辨錄老子注 등의 著書로 有名하다. 또 그는 生家로는 藥泉 南九萬의 養家로는 明齊 尹拯의 甥姪이고, 完南府院君 李厚源의 사위로서 趙持謙任泳등과 가장 友善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그는 當時 少論系譜의 名門出身으로서 學文과 文學이 뛰어났고, 親兄인 白石 泰維와 함께 筆苑의 名家로도 손꼽힌다.
그의 詩文集인 定齊集에 실린, 南學鳴 撰 行狀에 依하여 그의 略歷을 살펴보면, 그는 肅宗 元年 22歲에 生員, 同王 3年 謁聖文科에 壯元으로 及第한 뒤, 典籍을 거쳐 禮曹佐郞 때 試官이 되어 出題를 잘못하였다는 南人一派의 彈劾을 받아 宣川에 流配되었다. 이듬해 半年만에 宥還, 同王 6年 弘文館 修撰을 거쳐, 이듬해 뽑혀서 賜暇讀書官이 되었고, 이어 校理가 되었으나, 其間 吏曹判書 李端夏와 淸城府院君 金錫胄를 論駁하고, 吳始壽의 賜死를 反對하여 當路者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에 朝廷에 容納되지 못하고 자주 罷斥을 當하였다. 마침내 同王 8年 겨울 伊川縣監에 出補, 同王 12年 봄 5年만에 罷還하여 다시 修撰兵曹佐郞吏曹佐郞 등을 歷任하고 同年 湖南御使로 나갔다 돌아와 應敎에 陞進하였으나, 곧 坡州牧使에 出輔, 同王 14年 봄 牛栗黜享 事件으로 引免 歸家하였다.
이상이 定齊 朴泰輔의 略歷이거니와, 특히 朴泰輔하면, 仁顯王后 閔氏의 廢黜에 反對하여 直諫 節死한 것으로 더 有名하다. 그가 坡州에서 引免 家居한지 月餘만에, 所謂 己巳換局으로 西人이 물러나고 南人이 執權한 뒤, 肅宗의 繼妃인 仁顯王后 廢黜事件이 發生하였다.
肅宗實錄에 보면 (肅宗) 十五年 己巳 五月 己亥 殺前應敎朴泰輔로 하여, 朴泰輔를 죽였다고 所謂 春秋筆法을 보여 주고 있거니와, 그는 王의 親鞫에 抗直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도 더욱 酷毒한 刑罰을 받아, 火烙, 壓膝 등 가진 惡刑으로 살점이 모두 허트러졌어도 精神이 맑아 끝까지 昏迷하지 않았다. 그래서 世人이 모두 그의 忠誠을 가엾이 여기고, 그의 節義를 장하게 여겨, 平素 그를 함부로 헐뜯던 사람까지도 모두 心腹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마침내는 珍島<천0x7518>棘의 歸養길에 올라 겨우 鷺梁津 六臣祠 곁에 이르러 路死하였다.(肅宗實錄補闕正誤卷之二十日一丁, 十五年 己巳 五月己亥條 參照)

<*도>本書는 定齊가 宣川에 流配되었다가 돌아와 庚申(肅宗 6年) 11月 22日 副修撰에 拜命한 때로부터, 丙寅(同王 12年)까지 약 7年동안의 手記이다. 그리고 本書는 定齊別集에 收錄되어 있긴 하나, 藏書閣 所藏의 本書는 寫本으로서, 定齊의 私印이 있는 親筆手稿本이므로 本書의 編成年代나 過
程은 論勿 肅宗 6年으로부터 同 12年 사이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으며, 적어도 定齊가 節死하기 前에 이루어졌음이 틀림없다 하겠다.

本書는 이미 말하였듯이, 肅宗 6年으로부터 同 12年까지의 著者를 中心으로 다시 朝廷에서 있었던 일을 年月日順으로 기록한 居官日記인 바, 肅宗 8年 10月 定齊가 伊川縣監에 出輔, 5年 만에 罷還하기까지의 記錄은 朝廷에서 自身에 관하여 云謂된 事實만을 採取監錄하였기 때문에 內容이 매우 簡略하다.

어떻든, 本書는 朴定齊의 居官手記이므로, 그 內容紹介는 바로 定齊의 傳記一部를 紹介하는 것이 된다. 때문에 여기서는 그 重要한 內容 몇 가지만을 紹介하는데 그치기로 하겠다.
첫째, 肅宗元年(1675) 淸에서 先王 顯宗의 昇遐를 弔文하기 위하여 使臣을 보내왔는 바, 이 때는 南人의 執權時機여서 右相 吳始壽가 淸使의 <빈0x6483>接使가 되어 使臣을 맞았다. 이 때 淸使를 修行하였던 淸의 通官 張孝禮가 歸國도중 龍川에서 朝鮮側 譯官에게 하였다는 말이 문제가 되었다. 즉 張孝禮는 朝鮮譯官들에게 皇帝(淸)가 先國王(顯宗)이 오랜 痼疾을 가졌으면서도 事大하는 誠意가 변함이 없었고, 또 强臣에게 制御를 받아 자유롭지 못하였던 일이 있었기 때문에 特別히 異典을 베풀어 두 번씩이나 賜祭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아마 淸側은 당시 朝鮮政府의 政情을 探知하기 위하여 常例에 벗어나게 國喪을 두 번씩이나 特典을 베풀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어떻든 吳始壽는 淸使를 보내고 돌아와 이 말을 王에게 上奏하면서, 黃海監司 尹<계0x558C>도 張에게 이 말을 들었다고 添言하였다. 그러나 尹<계0x558C>는 두 차례나 上疏하여 自身은 듣지 못하였다고 辨明하다가 臺諫의 彈論을 받아 流配되었다. 이 때 西人側 人士들은 모두 지난날 顯宗朝에 當國하였던 西人을 <제0x71BF>陷하려고 吳始壽가 이 말(張孝禮의 말)을 造作한 것으로 여겼다 한다. 그 뒤 政局은 一變하여, 肅宗 6年(1680) 所謂 庚寅大黜陟이 이루어짐으로써, 南人이 失勢하고 西人이 執權하자, 吳始壽의 失脚은 물론 이것이 問題化 되었다. 그래서 이듬해 6月 마침내 吳는 賜되고, 關係 諸譯官들은 流配되었다. 이 때 定齊는 前任大臣인 吳의 加形에 反對하여 王의 뜻을 거슬렀기 때문에 朝廷에 容納되지 못하였다.
다음은, 肅宗 7年(1681) 10月, 淸城府院君 金錫胄(肅宗의 外叔)가 오랫동안 文廟에 配享하여 오던 苟況馬融玉肅등 中國의 歷代 儒學者 9人의 瑕疵를 指摘하여 文廟에서 黜享할 것을 建議하였다. 이때 朝廷에서는 이 建議에 대한 朝野의 是非가 紛<운0x6CE7>하였던 바, 定齊는 愼重論을 펴 不當하다고 異義를 提起, 이에 反對하는 上疏를 올렸다. 또 이와 同時에 當時 現職 吏曹判書인 李端夏가 銓長의 職에 適合한 人物이 아님을 들어 論駁하였다,.
李端夏를 論駁한 이유는, 첫째 求媚上下하였다는 것이고, 둘째 <광0x5704>怯失守하였다는 두 가지였다. 당초, 仁顯王后 閔氏의 嘉禮를 마치고, 后의 父인 *陽府院君閔維重의 實職 仍任問題가 論難되었다. 原來 朝鮮王朝에 들어와서는 王室과 婚姻關係를 가지면, 卽 國舅나 駙馬는 그 人才의 賢能與否는 勿論하고 實職에 任命하지 않는 것이 制度化한 前例였다, 그런데, 閔維重을 兵曹判書에 계속 留任한다는 王의 下命이 내리자, 大臣과 三司가 모두 이에 反對하였다. 이 때, 大司憲으로 現任 憲府의 長官이던 李端夏가 하나의 折衷案으로, 閔을 兵判에서 解任하여 衆議에 따르고, 그 대신 革弊廳을 別設하여 閔을 그 堂上官에 任命할 것을 疏請하였다. 定齊는 李의 이와 같은 疏請은 李가 王과 國舅에게 上下로 아첨하는 것이라고 指摘 論駁한 것이다.
또, 肅宗卽位年(16740 李端夏는 顯宗의 行狀을 撰進하였다. 이때, 李가 王命을 받들어 禮議의 首末을 修正添補한 일이 있었다. 定齊는 이를 지적, 李가 <광0x5704>怯하여 本來의 自己 所信을 지키지 못하였다고 論駁하고, 이와 같이, 上下로 아첨하고, <광0x5704>怯하여 所信이 없는 이가 銓長의 任에 適合한 人物이 못된다고 하였다. 이 일로 定齊는 王의 노여움을 사서 곧 罷職不敍되었다.
이밖에 經筵에서의 該博한 滑說과 餘他 細<쇄0x671F>한 事實을 이로 紹介하기 어려워 省略하기로 한다.

本書는 著者의 詩文集인 定齊集에 別集 卷之四와 卷之五로 上下 兩編에 나누어 收錄刊行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에 紹介하는 藏書閣 所藏本은 定齊의 親筆로 씌어진 手稿本인 점과, 定齊集에 收錄된 別集本과는 內容에 若干의 差異가 있다는 점에서 注目을 끈다. 이런 點에서 本書는 藏書閣에만 所藏된 唯一本으로서 貴重한 價値가 있다고 하겠다.
첫째, 定齊는 學文과 文學 뿐만 아니라, 書藝에도 뛰어난 名筆家로서, 매우 流麗한 筆致로 씌어졌다. 보통 이런 類의 手記가 草書體로 남겨져 後學들이 보기에 難解한데, 本書는 行書體로 되어 있어 누구나 알아보기 쉽다. 그리고 10行 22字의 井間을 使用하였기 때문에 行間이 定齊하다. 이런 點으로 보아 자칫 後人의 謄寫本으로 잘못 보기도 쉬우나, 이는 定齊가 官職
에서 여러 차례 罷斥된 機會에 틈틈이 整理 精書한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 開勸 初頭의 本書 첫 장 右下方에 가로 5.5cm, 세로 5.3 cm 의 端雅한 小篆體의 方角印이 찍혀 있는 바 1行에 5字씩 6行으로 潘南朴氏 泰輔 士元 甲午以降乙卯生員 丁巳壯元 任成賜暇 定齊散人之章이라 한 30字는 定齊의 本館聲名字號生年大小登科와 賜暇한 해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本書가 定齊의 私印이 찍힌 手澤本임을 證明하여 주는 좋은 證據이다.
다음, 誤字의 訂正이나, 혹은 潤文에 의한 改書도 있고, 極히 드문 일이나, 완전히 周爻 削除한 部分도 있다. 訂正이나 改書의 境遇에는 本來의 誤書部分을 도려내고 다른 종이를 붙여 改書한 곳도 몇 곳 있으나, 대부분 本來보다 더 진한 濃墨으로 눌러 써서 改書한 곳이 많으며, 落字는 往往 行間에 小字로 夾書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訂正改書의 痕迹은 後人의 傳寫本에서의 境遇와 比較할 때 本書가 著者의 親筆手稿本임을 確證하여 주기도 한다. 또 本書 中間部分의 一部分에 朱墨으로 批點이 찍혀 있는 바, 이는 定齊의 加點인지 後人의 加批인지 未詳하고 批點을 加한 意味도 알 수 없다.
끝으로 本書와 別集本과의 內容의 差異를 서로 對校하여 보면 定齊의 末年에 該當되는 記事, 卽 定齊가 伊川縣監에서 罷還한 뒤, 肅宗 12年(1686) 5月 湖南御使北評事 등에 任命된 前後 記事가 本書에는 없다. 아마 이는 뒤에 別集 編輯人이 收拾追加한 것으로 보인다. 또 本書에 收錄된 記事가 一部나마 別集本에서 漏落된 것은 그 漏落分의 內容으로 보아 또한 別集 編輯人의 才量으로 定齊의 行績과 切實하고 關係되지 않는다고 생각한 部分을 削除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그 漏落分의 內容을 보면, 定齊의 從兄으로서 當時 吏曹參議에 在職하던 朴泰尙에 關한 記事가 大部分이다. 本來 定齊는 그의 從兄인 泰尙에게 關心이 있어서 記錄하여 놓았던 것이나, 그의 後孫들 立場에서 볼 때에는 그리 重要視할만한 記事가 아니므로 削除하였던 것이라고 보인다.

以上, 大略 살펴본 바와 같이 本書는 著者 朴定齊의 36歲란 짧은 生涯 가운데 겨우 56年 동안에 걸친 居官手記에 不過하다. 그러나, 當時는 西人과 南人의 角逐이 極에 達하여 換局이 거듭되던 때였고, 이런 틈을 타 西人이 다시 老少 兩論으로 分派되던 時期로서 本來 西人에 屬하였던 定齊는 그 內外族親이 모두 少論의 巨物級들이었으며 定齊 自身 또한 그의 親兄 泰維와 함께 少論側의 精銳로 先鋒將格이었다.
吳始壽의 賜死反對, 聖<무0x60EB>黜享反對 및 李端夏論駁 등 一連의 事件과 聯關하여 登場하는 當時 人物의 系譜와 그들의 紛<운0x6CE7>한 論議를 分析하여 보면, 바로 當時 政爭의 焦點과 老少 兩論의 分派過程을 생생하게 看破할 수 있게 하여 준다. 이러한 點에서 本書가 朝鮮王朝 後期의 政治史 乃至 黨爭史 硏究에 놓은 資料가 됨을 贅言할 必要가 없겠다. 특히 本來 少論側의 年少氣銳한 先鋒將으로서 李端夏論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당시 國舅였던 閔維重의 任職에 反對하여 罷職不敍까지 當하였던 그가, 급기야 뒤에는 閔妃의 廢黜에 積極 反對하여 依然히 直諫 殉節한 일로 미루어 보더라도, 本書가 가지는 史料로서의 公正性을 充分히 認定되는 바이다. 간혹 一邊에만 치우치는 감을 느끼게 하는 餘他記錄들과는 比較하여 함께 말할 수 없는 良書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本書가 가지는 또 하나의 價値는 著者自身의 親筆 手稿本이란 點과 그의 私印찍힌 手澤本이라는 點에서 더욱 빛을 더한다고 하겠다.
<檀國大學校 講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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