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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 고서(한국본)
소장분관 : 도서관
기타분류기호 : MF"35-708, 995"
서명 / 저자 : 井上角五郞君略傳/ 李王職實錄編纂會 編
개인저자 : 이왕직실록편찬회
정상각오랑 (1882年代)
판사항 : 原本
발행사항 : [ ]: [ ], 1910 頃寫
형태사항 : 線裝1冊(23張); 27.6 × 20.1cm
일반주기 : 판심제: 被傳者 : 井上角五郞(1882年代)
내용주기 : 內容 : 日人 井上角五郞이 高宗 11年(1874) 甲申政變에 關與하여 前後周旋한 記錄
복제주기 : 마이크로필름.
마이크로필름 릴 ; 35 mm
청구기호 : K2-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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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부가정보

歸重圖書解題
井上角五郞君略傳
-韓國新聞史와 階級制度硏究資料-
安春根
이 冊의 藏書閣圖書韓國本目錄 134面 所載 書誌事項은 다음과 같다.
李王職實錄編募會 編 原本.1910項寫. 1冊(23張) 27.6×20.1cm 綿紙 : 被傳者 : 井上角五郞(1882年代)
內容 : 日人井上角五郞이 高宗 11年(1874)甲申政變에 關與하여 前後周旋한 記錄.
原稿紙墨書
그러나 이 冊은 井上의 傳吾十을 全部 墨書한 것이 아니고, 朝鮮總督府圖書館 藏書로서 博文局資料를 抄錄한 것이라는 小田의 確認印이 있는 바와 같이 第三章 朝鮮政府의 顧問으로부터 시작하여 被傳者가 漢城週報에 썼던 純 漠文體의 禁奴婢世役說全文을 轉載한 것으로 終章을 이루고 있다.
井上角五郞은 이미 韓國人名大事典의 附錄 外國人名에도 아래와 같이 紹介되어 있다.
이노우에 가꾸고로우 井上角五郞(1860-1938) (日) 언론인 1883년(고종20) 수신사 朴泳孝의 건의로 來韓. 外務衛門協辨 金允稙의 추천으로 외무아문 고문이 되어 漢城府判尹 金晩木直과 함께 그 해 10月 우리 나라 최초의 新聞인 純 漢文版 漢城旬報를 博文局에서 創刊, 1884年 1月 소위 淸兵暴行報道事件으로 동직을 인책 사임했으며, 그 해 10月 甲申政變으로 博文局이 燒失되고 金玉均, 朴泳孝 등이 日本으로 亡命하게 되자 함께 歸國했다. 1885年 1月 日本 外務大臣 井上馨가 甲申政變때의 日本側 被害 抗議次 來韓할 때 日本 時事新報 通信員 자격으로 함께 入國, 漠城旬報의 復刊에 努力했고, 이듬해 1月 종래의 旬刊을 週刊으로 하고 漢城周報로 개칭하여 國漢文 混用으 발간, 우리니라 신문사상 日本人으로선 보기 드문 공적을 남겼다.
이상으로 井上이 어떤 人物인가를 대강 알 수 있으나, 이 傳記를 보면 어떻게 하여 新聞發刊에 손댔으며, 그 影響이 韓國文化에 미친 結果, 그리고 아직 아무도 論及함이 없었으나 井上이 韓國의 階級制度改革에 努力했다고 하는 記錄등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림 1
이 傳記의 內容을 要約하건대,
① 1882年 12月 日本 福澤諭吉의 추천으로, 當時 朝鮮政府에서 日本에 派遣한 謝罪使의 一行이었던 朴泳孝. 徐光範, 洪英稙, 金玉均등을 따라 韓國에 들어왔다.
② 井上이 韓國에 派遣됨에 즈음해서 恩師인 福澤諭吉의 여러 가지 교훈과 指示事項.
③井上이 韓國에 들어왔을 當時의 韓國情勢 特히 淸國과의 關係.
④井上이 外衙門의 고문으로 招聘됨과 同時에 新聞發刊 準備.
⑤ 井上이 主宰한 漢城旬報의 기사가 問題되어 淸國의 抗議로 引責辭任.
⑥ 日本黨의 亂과 甲申政變.
⑦ 漢城旬報 復刊運動.
⑧ 1886年 漢城周報 發刊.
⑨ 漢城周報의 國渶文體 使用.
⑩ 奴婢世役을 廢止케 한 井上의 努力.
以上의 內容가운데서도 특별히 韓國最初로 新聞에서 國漢文을 使用했다는 것과 奴婢를 廢止하는데 힘썼다고 하는 두 가지 事實에 對하여 좀더 자세히 紹介하고자 한다.

이를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먼저 井上角五郞傳에 나타난 기록을 더듬어 볼 必要가 있는데, 거의 卷末에 가서 이 두 가지 事實을 要約해서 記述한 部分이 있기에 여기 轉載하기로 한다.
『君은 獨得한 創見으로 漢文에 諺文을 섞어 썼다. 漢城週報 第一號에는, 이 文體를 使用했다. 이는 前古未聞의 일이기에 最初는 사람들 눈에 珍奇하고, 따라서 심하게 非難하는 이도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 일반에게 그 便益이 認定되어, 이를 推稱하는 아도 많았다. 週報도 號를 거듭함에 따라 漢諺混合의 文章이 되어, 世間에서도 이에 좇아 朝鮮에 있어서의 普通文이 되었다. 君이 朝鮮의 開發에 貢獻한 일은 대단히 많은 중에서도 오직 이 한가지 일만으로 그 功이 千古에 不朽하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週報에 揭載한 君의 議論文章은 모두가 時務에 適切한 것인데, 舊來의 弊習을 打破하는 旨의 것이다. 禁奴婢世役說과 같은 것이 그 중의 하나다. 朝鮮에서의 奴婢는 或은 處刑, 或은 賣買에서 發生하는데 일단 그 같은 階級으로 浸潤되면, 그 一生은 말할 것도 없고, 子子孫孫의 未來까지 他人의 使役에 服從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官廳에 속함을 公賤이라하고, 民에 속함을 私賤이라 한다. 君은 이 같은 人道에 違背되는 것을 慨하여 極力으로 奴婢의 解放을 首唱했다. 當時 在韓의 美國領事도 또한 여러 번 이를 慫慂한 나머지 드디어 內外相應하여 마침내 朝議를 움직이게 되어 明治十八年(1885年)末에, 國王殿下로부터 奴婢世役禁止의 上論를 發하게 되었다. 君은 그 뜻을 達成한 것을 기뻐하여, 頌贊의 辭를 지어 週報에 登載했다.』
이것은 日本人이 엮은 日本人의 功績記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그렇다고 全的으로 否認할 수는 없다.
오히려 漢城旬報와 漢城周報의 發刊에 對해시는 韓國新聞史에서 일찍기 그의 功勞를 높이 評價하고 있다.
『이때 漢城周報는 國漢文의 섞어 쓰기 記事로 태반을 다루었고, 간혹 純 한글만의 기사도 썼으나, 여전히 純 漢文만의 記事도 취급하였다. 이제 漢域周報에 나타난 우리 나라 최초의 國漢文 섞어 쓰기 記事體를 보면 다음과 같다.
十月初八日 朝報云傳敎에 가라사대 去年事를 웃지 참아말 하랴 星霜이 己니,心에 傷悼이 이를 것없도다 戰亡軍卒과 閑散人에 慘禍를 橫被 者는 壇을 設하야 酌을 ×고 爵秧를 馳贈치 못者는 廟堂으로야곰 祥探票處야써 朝家에 優恤意를 示라 시다. 漢城周報가 한번 國漢文 섞어 쓰기 記事를 채용하자 일반 독자도 많이 읽게 되었고, 특히 이와 같이 한글을 쓰도록 하게 한 高宗을 찬양하는 소리도 나와 그 방향은 자못 좋았다. 이처럼 漢城周報에 한글을 섞어 쓰기 시작하기까지에는 姜瑋(1820∼?)와 博文局員, 그리고 宮中의 內官들의 숨은 공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외국인 輻澤諭吉과 井上角五良의 熱意를 높이 평가해야 될 것이다.
앞에서도 기록한 바와 같이 開化派의 先覺者들이 日本에 건너가서 新聞創刊에 관하여 福澤諭吉과 의견을 주고받았을 때 이미 그는 민족 고유 文字 의 普及만이 일반대중을 계몽하는데 가장 利器가 된다는 점을 指摘하였다. 이 때 開化派 有志들도 원칙적으로 이에 찬동하였으나 곧 실시하기에는 군비가 있어야 된다고 하여 이를 연구과제로 하였다. 그리하여 漢文만의 漢城旬報를 발행해 가면서 이 國漢文 섞어 쓰기 記事體의 연구에 착수하였다. 이를 도맡아 본 이가 姜瑋였다. 그는 宦官을 통하여 內人들이 所藏하고 있던 여러 가지 諺文책을 참고로 하여 國漢文 섞어 쓰기의 새 文體를 만들었다. 이것이 또한 宮中에까지 들어가서 좋은 평을 얻게되었다. 이 때 博文局員들도 이에 찬동하였으며 특히 井上角五郞은 金允稙의 적극적인 찬동을 얻어 마침내 高宗의 允許를 얻게 되었다. 이로써 종래의 특수 상승계급만의 漢字로부터 해방되어 일반 대중도 민족 고유의 알기 쉬운 한글로서 學問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뿐이 아니라 정치상의 의사를 나타낼 수가 있게 되었고 또 하나의 思想을 갖게 되었다.
新聞에 한글 사용이야말로 오랫동안 억눌렸던 일반대중이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새삼스럽게 찾아내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新聞에 한글 사용이야말로 오랫동안 억눌렀던 일반 대중이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새삼스럽게 찾아내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지난날의 言論이 主로 상층계급인
兩班과 中人들 사이에만 행하여 졌던 것을 이로부터는 일반 대중, 특히 庶民층에서도 일어나게 할 素地를 충분히 마련하였다.』
崔 埈 著 韓國新聞史 27面

한편 또 하나의 功績으로 나타난 奴婢廢止에 對한 努力은 어떠했는가? 이것이 事實이라면 어찌하여 그런 일을 했는가 그 背景을 알아 볼 必要가 있다.
『兩班은 언제나 官吏가 되는 權利를 獨占하고 있기 때문에 官吏가 되면 自由自在로 무엇이나 할 수 있다. 參判의 집에 태어난 사람은 바보라도 參判이 된다. 判書의 집에 태어나면 가만히 있어도 判書가 된다. 그 중에도 嫡出子를 尊重해서 庶出干는 賤待한다. 庶出子는 大臣의 집에 태어나도大臣이 될 수 없다. 先祖祭祀때도 嫡出尸는 上段에 오르나, 庶出者는 下段에서 拜禮해야한다. 그것이 今上陛下의 令으로 그런 習慣을 打破하고 庶出子도 大臣이 되게 하였다. 日本에 代理公使로 와 있던 金嘉鎭도 庶子다. 權在衡도 庶子다. 지금은 庶子로 大臣이 되는 사람이 있어도 하나도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으나. 오랫동안의 習慣은 무서운 것으로서, 아직도 庶子의 內閣이 되면 庶子가 많이 모이지만, 頑固한 사람이 內閣을 組織하면 한 사람의 庶子도 넣지를 않는다.
그만큼 階扱을 尊重하는 習慣이 있어 人材登庸은 決코 이루워질 수가 없다. 이에 兩班과 다른 農工商民의 關係가 어떠냐 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混和가 되지 않는다. 例를 들어, 지금 日本에 留學오는 사람들이 있다.
상당한 學問을 쌓고 歸國하는데, 이들 留學生은 雨班의 子弟가 오지 않기 때문에 이들 留學生에게 日本이 모처럼 好意를 베풀어 學問을 하게 해서 本國으로 돌려보내도, 어디서도 登庸하지 않는다. 間或 兩班집에 손이 닿아서 찾아가도 먼발치에서 몇 마디 말을 할 수 있을 뿐 相對해 주지를 않는다. 이들 兩班들은 日木에서 공부를 하면 건방지게 되므로, 그런 사람이란 朝鮮의 階級制度가 못마땅하여 학문을 하면 할 수록 陰謀的觀念이 일어나 아무래도 政府와 線이 먼 사람들과 사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모처럼 日本에서 공부할 사람들은 嫌疑를 받고 投獄되거나, 流配된다는 不幸한 處地에 놓이게 된다.
多幸히 生命을 保存하는 사람은 日本에 다녀갔다거나, 학문을 했다는 얼굴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뿐이다. 나는 그런 事情을 알기 때문에 夜深 할 때 조용히 불러서 親近하게 談話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弊를 고치려면 아무래도 階級制度를 公的으로 顚覆해버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것이 되지 않고는 숨을 죽이고 숨어살아야 한다. 日本에서는 同文學會라고 하는 것이 있어, 朝鮮 留學生들에게 便宣를 주게 되어있다. 이는 留學生들은 歸國한 다음에 不幸하게 되지만, 留學生들의 이야기를 父兄들에게 할 수 있다는데서 암암리에 非常한 效能이 있어, 이를 朝鮮政府가 아무리 防止策을 써도 效果가 없이, 점점 새로운 文物이 輸入되는 것이 바로 이 敎育의 結果로서 直接으로 自己가 目的한 바가 그 교육에 實效가 없더라도 間接的인 結果를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앞으로 斷然 계속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904年 加藤增雄談 朝鮮의 階級制度, 朝鮮經濟文庫 舊藏 프린트 本)
當時의 韓國에서의 奴婢制度가 韓國內에서만의 社會問題가 아니라, 日本內에서도 自國의 利益을 위해서 問題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 紹介한 井上角五郞의 傳記에서 特記할 수 있다고 하는 두 가지 事實, 卽 國漢文 混用文體의 普及이나, 奴婢廢止問題가 따지고 보면 前者는 井上角五郞의 恩師인 福澤諭吉의 指令에서 비롯되었고, 後者인 奴婢廢止問題는 當時의 日本內에 있어서의 輿論에 符合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甲午更張을 前後하여 日本이 韓國을 侵略함에 앞서, 新聞을 通한 民衆의 啓蒙을 위하여 關心이 컸을 뿐만 아니라, 特히 한글의 普及으로서 讀者의 底邊擴大를 主張한 合理的인 福澤諭吉의 指示는 그대로 適中한 것이지만, 다른 한가지 奴婢廢止와 兩班制度에서 派生되는 日本留學生들의 韓國內에서의 活動問題는 바로 卽時<효0x7C9D>果가 있었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이 傳記에 나타난 대로 井上의 言論을 通한 努力이 韓國에 뿌리 박혔던 奴婢制度를 廢止케 하는 源動力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韓國의 階級制度硏究에도 重要한 事實일 뿐 아니라 언론의 功績으로도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高麗大學校 政經大學 講師〉

부가정보

歸重圖書解題
井上角五郞君略傳
-韓國新聞史와 階級制度硏究資料-
安春根
이 冊의 藏書閣圖書韓國本目錄 134面 所載 書誌事項은 다음과 같다.
李王職實錄編募會 編 原本.1910項寫. 1冊(23張) 27.6×20.1cm 綿紙 : 被傳者 : 井上角五郞(1882年代)
內容 : 日人井上角五郞이 高宗 11年(1874)甲申政變에 關與하여 前後周旋한 記錄.
原稿紙墨書
그러나 이 冊은 井上의 傳吾十을 全部 墨書한 것이 아니고, 朝鮮總督府圖書館 藏書로서 博文局資料를 抄錄한 것이라는 小田의 確認印이 있는 바와 같이 第三章 朝鮮政府의 顧問으로부터 시작하여 被傳者가 漢城週報에 썼던 純 漠文體의 禁奴婢世役說全文을 轉載한 것으로 終章을 이루고 있다.
井上角五郞은 이미 韓國人名大事典의 附錄 外國人名에도 아래와 같이 紹介되어 있다.
이노우에 가꾸고로우 井上角五郞(1860-1938) (日) 언론인 1883년(고종20) 수신사 朴泳孝의 건의로 來韓. 外務衛門協辨 金允稙의 추천으로 외무아문 고문이 되어 漢城府判尹 金晩木直과 함께 그 해 10月 우리 나라 최초의 新聞인 純 漢文版 漢城旬報를 博文局에서 創刊, 1884年 1月 소위 淸兵暴行報道事件으로 동직을 인책 사임했으며, 그 해 10月 甲申政變으로 博文局이 燒失되고 金玉均, 朴泳孝 등이 日本으로 亡命하게 되자 함께 歸國했다. 1885年 1月 日本 外務大臣 井上馨가 甲申政變때의 日本側 被害 抗議次 來韓할 때 日本 時事新報 通信員 자격으로 함께 入國, 漠城旬報의 復刊에 努力했고, 이듬해 1月 종래의 旬刊을 週刊으로 하고 漢城周報로 개칭하여 國漢文 混用으 발간, 우리니라 신문사상 日本人으로선 보기 드문 공적을 남겼다.
이상으로 井上이 어떤 人物인가를 대강 알 수 있으나, 이 傳記를 보면 어떻게 하여 新聞發刊에 손댔으며, 그 影響이 韓國文化에 미친 結果, 그리고 아직 아무도 論及함이 없었으나 井上이 韓國의 階級制度改革에 努力했다고 하는 記錄등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림 1
이 傳記의 內容을 要約하건대,
① 1882年 12月 日本 福澤諭吉의 추천으로, 當時 朝鮮政府에서 日本에 派遣한 謝罪使의 一行이었던 朴泳孝. 徐光範, 洪英稙, 金玉均등을 따라 韓國에 들어왔다.
② 井上이 韓國에 派遣됨에 즈음해서 恩師인 福澤諭吉의 여러 가지 교훈과 指示事項.
③井上이 韓國에 들어왔을 當時의 韓國情勢 特히 淸國과의 關係.
④井上이 外衙門의 고문으로 招聘됨과 同時에 新聞發刊 準備.
⑤ 井上이 主宰한 漢城旬報의 기사가 問題되어 淸國의 抗議로 引責辭任.
⑥ 日本黨의 亂과 甲申政變.
⑦ 漢城旬報 復刊運動.
⑧ 1886年 漢城周報 發刊.
⑨ 漢城周報의 國渶文體 使用.
⑩ 奴婢世役을 廢止케 한 井上의 努力.
以上의 內容가운데서도 특별히 韓國最初로 新聞에서 國漢文을 使用했다는 것과 奴婢를 廢止하는데 힘썼다고 하는 두 가지 事實에 對하여 좀더 자세히 紹介하고자 한다.

이를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먼저 井上角五郞傳에 나타난 기록을 더듬어 볼 必要가 있는데, 거의 卷末에 가서 이 두 가지 事實을 要約해서 記述한 部分이 있기에 여기 轉載하기로 한다.
『君은 獨得한 創見으로 漢文에 諺文을 섞어 썼다. 漢城週報 第一號에는, 이 文體를 使用했다. 이는 前古未聞의 일이기에 最初는 사람들 눈에 珍奇하고, 따라서 심하게 非難하는 이도 있었으나, 오래지 않아 일반에게 그 便益이 認定되어, 이를 推稱하는 아도 많았다. 週報도 號를 거듭함에 따라 漢諺混合의 文章이 되어, 世間에서도 이에 좇아 朝鮮에 있어서의 普通文이 되었다. 君이 朝鮮의 開發에 貢獻한 일은 대단히 많은 중에서도 오직 이 한가지 일만으로 그 功이 千古에 不朽하다는 것을 의심치 않는다.
週報에 揭載한 君의 議論文章은 모두가 時務에 適切한 것인데, 舊來의 弊習을 打破하는 旨의 것이다. 禁奴婢世役說과 같은 것이 그 중의 하나다. 朝鮮에서의 奴婢는 或은 處刑, 或은 賣買에서 發生하는데 일단 그 같은 階級으로 浸潤되면, 그 一生은 말할 것도 없고, 子子孫孫의 未來까지 他人의 使役에 服從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官廳에 속함을 公賤이라하고, 民에 속함을 私賤이라 한다. 君은 이 같은 人道에 違背되는 것을 慨하여 極力으로 奴婢의 解放을 首唱했다. 當時 在韓의 美國領事도 또한 여러 번 이를 慫慂한 나머지 드디어 內外相應하여 마침내 朝議를 움직이게 되어 明治十八年(1885年)末에, 國王殿下로부터 奴婢世役禁止의 上論를 發하게 되었다. 君은 그 뜻을 達成한 것을 기뻐하여, 頌贊의 辭를 지어 週報에 登載했다.』
이것은 日本人이 엮은 日本人의 功績記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러나 그렇다고 全的으로 否認할 수는 없다.
오히려 漢城旬報와 漢城周報의 發刊에 對해시는 韓國新聞史에서 일찍기 그의 功勞를 높이 評價하고 있다.
『이때 漢城周報는 國漢文의 섞어 쓰기 記事로 태반을 다루었고, 간혹 純 한글만의 기사도 썼으나, 여전히 純 漢文만의 記事도 취급하였다. 이제 漢域周報에 나타난 우리 나라 최초의 國漢文 섞어 쓰기 記事體를 보면 다음과 같다.
十月初八日 朝報云傳敎에 가라사대 去年事를 웃지 참아말 하랴 星霜이 己니,心에 傷悼이 이를 것없도다 戰亡軍卒과 閑散人에 慘禍를 橫被 者는 壇을 設하야 酌을 ×고 爵秧를 馳贈치 못者는 廟堂으로야곰 祥探票處야써 朝家에 優恤意를 示라 시다. 漢城周報가 한번 國漢文 섞어 쓰기 記事를 채용하자 일반 독자도 많이 읽게 되었고, 특히 이와 같이 한글을 쓰도록 하게 한 高宗을 찬양하는 소리도 나와 그 방향은 자못 좋았다. 이처럼 漢城周報에 한글을 섞어 쓰기 시작하기까지에는 姜瑋(1820∼?)와 博文局員, 그리고 宮中의 內官들의 숨은 공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특히 외국인 輻澤諭吉과 井上角五良의 熱意를 높이 평가해야 될 것이다.
앞에서도 기록한 바와 같이 開化派의 先覺者들이 日本에 건너가서 新聞創刊에 관하여 福澤諭吉과 의견을 주고받았을 때 이미 그는 민족 고유 文字 의 普及만이 일반대중을 계몽하는데 가장 利器가 된다는 점을 指摘하였다. 이 때 開化派 有志들도 원칙적으로 이에 찬동하였으나 곧 실시하기에는 군비가 있어야 된다고 하여 이를 연구과제로 하였다. 그리하여 漢文만의 漢城旬報를 발행해 가면서 이 國漢文 섞어 쓰기 記事體의 연구에 착수하였다. 이를 도맡아 본 이가 姜瑋였다. 그는 宦官을 통하여 內人들이 所藏하고 있던 여러 가지 諺文책을 참고로 하여 國漢文 섞어 쓰기의 새 文體를 만들었다. 이것이 또한 宮中에까지 들어가서 좋은 평을 얻게되었다. 이 때 博文局員들도 이에 찬동하였으며 특히 井上角五郞은 金允稙의 적극적인 찬동을 얻어 마침내 高宗의 允許를 얻게 되었다. 이로써 종래의 특수 상승계급만의 漢字로부터 해방되어 일반 대중도 민족 고유의 알기 쉬운 한글로서 學問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가 있게 되었다. 그것뿐이 아니라 정치상의 의사를 나타낼 수가 있게 되었고 또 하나의 思想을 갖게 되었다.
新聞에 한글 사용이야말로 오랫동안 억눌렸던 일반대중이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새삼스럽게 찾아내는 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新聞에 한글 사용이야말로 오랫동안 억눌렀던 일반 대중이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를 새삼스럽게 찾아내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지난날의 言論이 主로 상층계급인
兩班과 中人들 사이에만 행하여 졌던 것을 이로부터는 일반 대중, 특히 庶民층에서도 일어나게 할 素地를 충분히 마련하였다.』
崔 埈 著 韓國新聞史 27面

한편 또 하나의 功績으로 나타난 奴婢廢止에 對한 努力은 어떠했는가? 이것이 事實이라면 어찌하여 그런 일을 했는가 그 背景을 알아 볼 必要가 있다.
『兩班은 언제나 官吏가 되는 權利를 獨占하고 있기 때문에 官吏가 되면 自由自在로 무엇이나 할 수 있다. 參判의 집에 태어난 사람은 바보라도 參判이 된다. 判書의 집에 태어나면 가만히 있어도 判書가 된다. 그 중에도 嫡出子를 尊重해서 庶出干는 賤待한다. 庶出子는 大臣의 집에 태어나도大臣이 될 수 없다. 先祖祭祀때도 嫡出尸는 上段에 오르나, 庶出者는 下段에서 拜禮해야한다. 그것이 今上陛下의 令으로 그런 習慣을 打破하고 庶出子도 大臣이 되게 하였다. 日本에 代理公使로 와 있던 金嘉鎭도 庶子다. 權在衡도 庶子다. 지금은 庶子로 大臣이 되는 사람이 있어도 하나도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으나. 오랫동안의 習慣은 무서운 것으로서, 아직도 庶子의 內閣이 되면 庶子가 많이 모이지만, 頑固한 사람이 內閣을 組織하면 한 사람의 庶子도 넣지를 않는다.
그만큼 階扱을 尊重하는 習慣이 있어 人材登庸은 決코 이루워질 수가 없다. 이에 兩班과 다른 農工商民의 關係가 어떠냐 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混和가 되지 않는다. 例를 들어, 지금 日本에 留學오는 사람들이 있다.
상당한 學問을 쌓고 歸國하는데, 이들 留學生은 雨班의 子弟가 오지 않기 때문에 이들 留學生에게 日本이 모처럼 好意를 베풀어 學問을 하게 해서 本國으로 돌려보내도, 어디서도 登庸하지 않는다. 間或 兩班집에 손이 닿아서 찾아가도 먼발치에서 몇 마디 말을 할 수 있을 뿐 相對해 주지를 않는다. 이들 兩班들은 日木에서 공부를 하면 건방지게 되므로, 그런 사람이란 朝鮮의 階級制度가 못마땅하여 학문을 하면 할 수록 陰謀的觀念이 일어나 아무래도 政府와 線이 먼 사람들과 사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모처럼 日本에서 공부할 사람들은 嫌疑를 받고 投獄되거나, 流配된다는 不幸한 處地에 놓이게 된다.
多幸히 生命을 保存하는 사람은 日本에 다녀갔다거나, 학문을 했다는 얼굴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뿐이다. 나는 그런 事情을 알기 때문에 夜深 할 때 조용히 불러서 親近하게 談話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弊를 고치려면 아무래도 階級制度를 公的으로 顚覆해버리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것이 되지 않고는 숨을 죽이고 숨어살아야 한다. 日本에서는 同文學會라고 하는 것이 있어, 朝鮮 留學生들에게 便宣를 주게 되어있다. 이는 留學生들은 歸國한 다음에 不幸하게 되지만, 留學生들의 이야기를 父兄들에게 할 수 있다는데서 암암리에 非常한 效能이 있어, 이를 朝鮮政府가 아무리 防止策을 써도 效果가 없이, 점점 새로운 文物이 輸入되는 것이 바로 이 敎育의 結果로서 直接으로 自己가 目的한 바가 그 교육에 實效가 없더라도 間接的인 結果를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앞으로 斷然 계속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904年 加藤增雄談 朝鮮의 階級制度, 朝鮮經濟文庫 舊藏 프린트 本)
當時의 韓國에서의 奴婢制度가 韓國內에서만의 社會問題가 아니라, 日本內에서도 自國의 利益을 위해서 問題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여기 紹介한 井上角五郞의 傳記에서 特記할 수 있다고 하는 두 가지 事實, 卽 國漢文 混用文體의 普及이나, 奴婢廢止問題가 따지고 보면 前者는 井上角五郞의 恩師인 福澤諭吉의 指令에서 비롯되었고, 後者인 奴婢廢止問題는 當時의 日本內에 있어서의 輿論에 符合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甲午更張을 前後하여 日本이 韓國을 侵略함에 앞서, 新聞을 通한 民衆의 啓蒙을 위하여 關心이 컸을 뿐만 아니라, 特히 한글의 普及으로서 讀者의 底邊擴大를 主張한 合理的인 福澤諭吉의 指示는 그대로 適中한 것이지만, 다른 한가지 奴婢廢止와 兩班制度에서 派生되는 日本留學生들의 韓國內에서의 活動問題는 바로 卽時<효0x7C9D>果가 있었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이 傳記에 나타난 대로 井上의 言論을 通한 努力이 韓國에 뿌리 박혔던 奴婢制度를 廢止케 하는 源動力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韓國의 階級制度硏究에도 重要한 事實일 뿐 아니라 언론의 功績으로도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高麗大學校 政經大學 講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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