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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 고서(한국본)
소장분관 : 도서관
기타분류기호 : MF35-856
서명 / 저자 : 甲申日錄略抄 / 金玉均(朝鮮) 著 ; 李王職實錄編纂會 編
개인저자 : 김옥균 (조선), 1851-1894
단체저자 : 이왕직실록편찬회
판사항 : 筆寫本(稿本)
발행사항 : [ ] : [ ], [1900 頃寫]
형태사항 : 線裝 1冊(55張) : 四周雙邊 半郭 22.5 × 15.6cm, 烏絲欄, 半葉 10行 20字, 上黑魚尾 ; 27 × 19.6cm
해제사항 : 高宗21年(1884) 甲申政變에 關한 金玉均의 手記
복제주기 : 마이크로필름.
마이크로필름 릴 1개 ; 35 mm
소장본주기 : 印 : 李王家圖書之章
청구기호 : K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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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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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부가정보

甲申日錄略抄

전철기*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박사과정

Ⅰ.서지적 고찰

장서각도서번호 2-155
李王職實錄編纂委員會. 稿本(1900년경 필사).
不分卷 1책 55장. 四周雙邊. 半郭 22.5×18.6cm.
烏絲欄. 半葉 10行20字. 上黑魚尾. 27×19.6cm. 線裝.
印: 李王家圖書之印.

金玉均이 저술한 『甲申日錄略抄』(이하『略抄』로 표기)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주목되어 온 자료이다.1) 이 문헌은 金玉均의 생애연구에 필수적인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變法的·改良的 開化派2)의 形成·發展·分化過程, 그리고 甲申政變을 전후로 한 國內政治勢力의 推移와 國際政勢의 變化 등을 다른 어느 문헌보다 잘 나타내 준다.
하지만 原本이 존재하지 않고 國內外에 많은 異本이 유통하고 있지만 여러 판본을 수집·분석하는 기초적 작업은 소홀하였다. 또한 개인 기록이 갖는 한계를 인식하여 동시대의 內外國人에 의해 남겨진 기록3) 및 公文書類 등과 비교하면서 『약초』를 분석하는 작업 역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무엇보다 국내외에서 散見되고 있는 『略抄』의 각종 판본을 정리·분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우선 국내외에 소장되어 있는 『약초』의 판본을 소개하고 이들 판본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略抄』에 대해서는 山邊健太郞와 金鳳珍이 판본의 소개와 분류를 한 바 있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는 다소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4) 사실 문건의 분류는 필사자료인가 출판자료인가라는 점과 문건의 소장처가 어디냐 하는 점, 두 가지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소장처에 따른 분류는 국가별, 그리고 개인소장과 기관소장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여러 판본들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韓國所藏資料
1)기관소장
①所藏閣本
표지에 甲申日錄全이라는 제호가 붙어있고, 본문의 첫머리가 甲申日錄略抄 金玉均著로 시작된다. 『약초』의 표기상 특징으로는 표점이 없고 측면에 李王職實錄編纂用紙라고 인쇄되어 있는 원고용지에 한문에 능통한 필사요원에 의해 만년필 혹은 펜을 가지고 정서되었다는 것이다.5) 그리고 46군데에 걸쳐 수정의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는 잘못된 글자를 만년필로 지우고 수정한 경우와6) 붉은 글자로 고친 경우,7) 그리고 교정부호를 이용하여 글자를 삽입하는 경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8) 다른 판본과는 달리 공공기관에서 주도하여 사본의 작성이 이루어진 점이 주목할 만 하다.9)
이외에도 藏書閣本은 다른 판본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주를 細字 처리해서 본문에 기입한 여타 판본과는 달리 괄호로 묶어 본문과 동일한 크기로 본문에 배열하였고, 소위 座次之圖라 불리는 우정국 연회 당시 좌석의 배열도가 席次之圖라 명명, 삽입되어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타판본에서는 모두 12월 6일자에 포함된 내용이 12월 5일자에 배치되어 있는 사실에 있다. 入來云云…으로 시작하여 …竟至日暮로 끝나는 총 406자의 내용에는 淸의 通譯이 와서 원세개가 배알함을 원한다고 통고한 뒤 淸軍이 개입하고, 이에 대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밀리는 김옥균일파와 일본군의 모습, 그리고 인천으로의 피신을 논의하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내용상으로 보면 12월 6일자로 편집된 것이 정상인 듯 한데, 아마도 편찬과정에서 다른 판본과 비교·검토하는 과정 중에 발생한 실수가 아닌가 여겨진다.
②奎章閣本
분류번호 古4280-3
1935년 필사, 불분권 1책 42장, 27.5×19.5cm, 線裝.
印:京都帝國大學中央圖書館所藏
표점이 되어 있는데 일본식 약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에 의해 전사된 듯 하다.10) 원래는 京都大本이나 경성제국대학시절 이관되어 현재까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판본이다.
③서울대中央圖書館本
京都大本을 저본으로 서울대 외교학과 金容九교수가 1960年代에 한학에 능통한 古老를 위촉, 京都大本을 銅版에 전사하여 필사한 것이다. 서지사항은 규장각본과 동일하다.11)

2)개인소장
①吳世昌本
寫本, 不分卷1冊, 四周雙邊, 半郭 18.9×12.7cm, 藍格<초0x75F9>本, 半葉 10行 20字, 內向黑魚尾, 23×16cm, 線裝. 楷書體로 단정히 필사되었고 1962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되어 현재 葦滄文庫로 분류·소장되어 있으며, 분류기호는 <古216-2>이다. 藏書閣에 원본을 촬영한 마이크로필름이 소장되어 있다. 장서각본이 토대가 되어 필사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12) 필자가 확인해 본 결과 사실과 다르다. 여러 자료를 비교·검토하며 필사한 듯, 매우 정치하여 주목해 보아야 할 판본이다.

② 李瑄根本
謄寫本, 32.4×21cm, 無界, 半葉 10行 23字.
내용을 검토해 보니 경도대본과 동일하다. 다만 밝혀지지 않은 부분은 소장자가 상기 도서의 원본을 어떻게 소장하게 되었느냐는 점이다.
일본에서 직접 필사했거나 아니면 해방 이후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를 필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소장자가 植民地時期에 정규 교육를 통해 역사학을 정식으로 전공한 사실을 감안할 때, 전자가 보다 많은 가능성을 가지지 않을까 한다. 표점이 되어 있고, 경도대본에서 일본식 약자로 되어 있는 문구를 모두 정자로 바꾸어 놓았다.

③ 徐仲錫本13)
不分卷 1책49장, 四周雙邊, 半郭 19.7×13.3cm, 藍格<초0x75F9>本, 半葉 10行 18字, 內向黑魚尾.
책의 두 번째 장에 김옥균의 흑백사진14)이 붙어 있고 본문의 첫장에 金玉均日記 甲申日錄이라 쓰여져 있다. 장서각본처럼 주를 괄호 속에 넣어 본문에 배열하였다. 푸른색 잉크를 사용하여 필사하였고, 필사된 지면에 開城(廣昌紙物鋪謹製) 百濟라고 인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식민지 시대, 최소한 한국전쟁 이전에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내에 소개된 판본 중 내용이 가장 소략하고 誤字가 다수 산견된다.

2. 日本所藏資料

1) 기관소장

① 京都大本
서지사항이나 내용은 규장각본과 동일하다.
②東洋文庫本(미입수)
幣原坦의 藏本을 기증받아 소장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15) 비교적 정치한 본으로 알려져 있다.
③靜嘉堂文庫本(미입수)
비서유찬본을 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6)
2)개인소장
稻沼端穗本(미입수)
1887년에 필사되어 소장자가 입수한 것으로 필사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고 하나 일부의 낙장이 있다고 전해진다.
3.出版本
1)韓國出版
亞細亞文化社本:『金玉均全集』에 실려있는 것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경도대본을 1979년에 영인·출판하였다. 표지글자나 분문의 글자가 동일하다. 이외에도 「治道略論」등 8편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
2)日本出版
伊藤博文 秘書類簒 朝鮮交涉資料本17):39면으로 되어 있으며 상기도서 上卷에 실려 있다. 일본에 소개된 『略抄』의 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써 金玉均自書日記라는 대제목 하에 甲申日錄略抄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3)中國出版
中國近代史資料叢刊本(미입수):「金玉均甲申日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내용은 비서유찬본과 동일하다고 한다.18)
4.國譯本19)
1)『甲申政變記』:저자미상, 불분권 1책 109장, 1909년(추정)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로 현재 나와 있는 번역본 중 最古本으로 추측된다. 책의 첫장에 隆熙三年 七月 日;明治四十二年七月 日이라고 붓으로 필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09년경부터 저술이 시작되어 1910년 이후에 탈고한 것으로 짐작된다.20) 원본을 정확하게 국역하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약초』를 저본으로하여 기술했을 것으로 판단되며, 중간 중간 원본에 없는 내용이 부가된 것으로 보아 『약초』를 보완하는 자료적 기능도 어느 정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47, 48, 55장이 각각 누락되어 있다.
2) 金永鎭, 「甲申日記」(민태원, 『甲申政變과 金玉均』, 國際文化協會, 1947)
총 49면이 게재되어 있다. 책의 권두의 화보 속에서 김옥균 자필로 쓰여졌다는 座次之圖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가 원본을 입수, 이를 토대로 국역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3) 김옥균외, 『한국의 개화사상』, 삼성출판사, 1990.
분량은 총64면으로 한학자인 李民樹에 의해 국역되었다. 번역의 저본이 어떤 본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동일한 인물이 해제를 쓴 『金玉均全集』에 경도대본이 실린 것으로 보아, 이 책도 역시 동일한 대본을 토대로 국역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4)趙一文譯註, 『甲申日錄』, 建國大學校 出版部, 1977.
원문 42면과 함께 약간의 주석을 단 번역문 84면이 실려 있다. 간행사에 이 책은 이선근 소장본과 동양문고 소장본을 대조하여 국역이 진행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21) 하지만 책의 뒷 부분에 게재된 내용은 경도대본과 상당히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5.『甲申日錄略抄』의 제호
①甲申日錄(京都大, 奎章閣, 서울대 中央圖書館)
②甲申日記(김영진 번역본)
③甲申日記錄(갑신정변기)
④甲申日錄(발견치 못함)22)
⑤甲申日錄略抄(장서각, 비서유찬, 오세창)
⑥金玉均手書日記(발견치 못함)23)
⑦金玉均自書日記(비서유찬본)24)
⑧金玉均甲申日記(중국근대사자료총서)
⑨金玉均日記 甲申日錄(서중석)
위의 열거된 제목을 살펴보면 갑신일록라는 제호가 제일 많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문건이 京都大本을 토대로 필사된 것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갑신일록약초라는 제목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사억의 주장처럼 저본이 된 일기가 존재하고 그것에서 초략한 내용이기 때문에 이를 원제목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25) 국내외에 걸친 다양한 소장본에서 갑신일록약초라는 제호를 사용한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따라서 차후 자료에 대한 호칭은 종전과는 다르게 사용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약초』를 검토하고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는 對照資料로 위에서 소개한 각종 문건 이외에 『尹治昊日記』와 福澤諭吉의 「明治十七年 朝鮮京城變亂の始末」등이 선행연구자들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이와 더불어 활용할 수 있는 자료로 아래의 자료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甲申政變案』:寫本, 不分卷 1冊 172장, 四周單邊, 半郭 21.4×15cm, 烏絲欄, 半葉 10行 19字, 25×17cm. 線裝. 霞城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유일본으로 새로 발견된 자료이다. 甲申政變이 실패로 돌아가고 참가세력이 仁川으로 철수한 뒤 韓日關係者들이 이의 수습을 위해 진행하였던 소위 書面外交에서 양측간에 甲申·乙酉·丙戌(1884∼1886) 삼년에 걸쳐 주고 받았던 서찰을 수록한 책이다.26) 아울러 권두에는 갑신정변의 관변기록인 甲申變亂事實이 실려 있다. 아울러 책의 후미에는 中東戰記<초0x75F9>錄이라는 제호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 <誅叛記>와 <追紀 叛臣> 두 부분으로 구성된 이 글은 開化黨의 形成, 新舊勢力의 갈등과 갑신정변의 발생, 정변의 실패 후 주도세력의 도주와 한일양국의 협상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특히 金玉均의 暗殺을 담당했던 洪鍾宇와 암살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고 있다. 27) 내표지에 이선근 박사의 친필로 卞元圭28)家 所藏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의 편집과 서술은 변원규가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Ⅱ.편찬경위
1.저자
김옥균은 忠淸道 公州에서 安東人 金炳台와 靈光 宋氏사이의 장남으로 1851년(哲宗 2)에 태어났다.29) 자는 伯溫, 호는 古愚·古筠이다. 7세 때 당숙인 金炳基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기를 거쳤다. 그 후 양부인 炳基가 강릉부사가 되자 그를 따라 임지로 가서 栗谷祠堂에서 사사하였다. 청년기에 朴珪壽의 문하에서 사사하면서30) 劉鴻基 등과의 교류를 통해 개화사상을 접하였다.31) 1872년 알성문과에 자원으로 급제하여 관문에 들어섰고, 1874년 弘文館校理로 임명되었다.
일찍이 개화승인 李東仁을 통해 일본의 발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스스로 일본의 근대화를 살펴보기 위하여 3차에 걸쳐 도일하였다. 1차 도일은 1881년 음력 12월로 임오군란의 발생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직후에 당시 조선과 일본이 공통적으로 지향해야 할 문제를 서술했다고 추정되는 『箕和近事』를 편찬하였다. 이후 承政院右副承旨·參議交涉通商事務·吏曹參議·戶曹參判·外衙門協辨 등을 역임하였다. 임오군란 직후 1882년 수신사 박영효의 고문자격으로 2차 도일을 하여 徐光範 등과 함께 徐載弼 등의 본국유학생을 日本陸軍士官學校 등에 입학시키고, 福澤諭吉·後藤象次郞 등의 일본측 인사와 교류하면서 조선의 근대화에 대해 협의하였다.32) 1883년 6월 국왕의 위임장을 들고 국채모집을 위해 3차로 도일하여 日本·美國·英國의 관계자와 접촉하였으나 실패하고 아무 성과없이 귀국하게 되었다.
후에 下向式 開化·改革을 위해서는 强制的 措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꾀하였다. 결국 이는 실패로 돌아가고, 같은 해 12월 9일 김옥균은 朴泳孝·서재필 등 주도세력 9인과 함께 일본 우편선 千歲丸 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 후 일본에 대한 배신감을 폭로하고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회복할 목적으로 『甲申日錄略抄』를 저술하게 된다.
한편, 김옥균은 舊自由黨 출신인 玄洋社 系列의 일본 극우파와 國內의 大院君 勢力 등과 결탁, 정치적 복귀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재기를 위한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정부에 부담이 되어 小笠原島에 유배가 되기도 하였다.
김옥균은 본국 내의 보수세력에 의해 계속적인 위협에 시달렸는데, 1886년 5월 統理軍國事務衙門 主事인 池運永이 파견되어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李鴻章과 三和主義에 입각하여 東洋平和를 논하여 보겠다는 생각을 지닌 김옥균은 李逸稷·洪鍾宇·和田延次郞 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결국 1894년 3월 28일 上海 美國租界內의 일본여관인 東和洋行에서 근왕주의자인 홍종우에 의해 암살된다.
이후 조선정부는 국내로 들어온 김옥균의 시신을 楊和津에서 능지처참하여 전국에 효시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의 친지들은 金氏友人會를 組織, 東京의 本願寺에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1910년(융희 4)에 特贈正一品大匡輔國崇祿大夫奎章閣大提學에 추증되었고, 忠達이라는 諡號를 받으며 공식적으로 복권이 된다.33)

2.저술연대
김옥균이 『약초』를 저술한 시기는 아래의 『朝野新聞』(1885년 9월 5일자)기사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同씨는 我邦에 逃亡하여 와서 橫濱·神戶 等地에 流寓하였지만 요사이는 銀座附近에 寓居하여 전혀 來客을 謝絶하고 붓을 幽窓 밑에서 弄하면서 지금까지 겪은 岐嶇한 일들을 著述하고 있다는 소식, 완성되면 반드시 새로운 事實도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34)
위의 기사를 보건대 김옥균은 1885년 9월 이전에 칩거하면서 『약초』의 저술에 들어갔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李文忠公全書』『寄漢城袁道』 光緖十二年正月初九日辰刻(1886. 2. 12 오전8시경)에 나는 김옥균의 일기를 얻었다(…我得金玉均日記…)라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당시 중국측 인사가 일본에서 『약초』를 취득하고 이를 배편으로 중국까지 발송하는 시간을 감안해보면 적어도 1886년 1월을 전후한 시기에 원고는 탈고된 것으로 생각된다.35)
Ⅲ.편찬체제와 내용
총 13,737자로 이루어진 『약초』는 壬年 11월(1882. 12)에서 시작되어 甲申年 12월 6일자로 끝을 맺는다. 형태상으로 볼 때 1882년 12월부터 1884년 10월까지는 회상기의 형식이고, 1884년 10월 30일부터는 일기체의 형식으로 양분해 볼 수 있다.
내용상으로 보면 임오년에 국왕의 명령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부터 시작하여 閔氏戚族이 중심이 된 보수세력과 當五錢의 鑄造를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 그리고 당시 일본측 인사들과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대하여 협의하면서 병역지원에 관해 논의하고 자파세력과 어울려 정변을 준비하던 과정을 기록한 부분, 그리고 갑신정변 3일 동안의 사건을 기록한 부분 등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변법적 개화파의 위기의식 심화
1884년 당시 변법적 개화파(이후 변법파)36)들은 당시 정치적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天津으로 납치되고 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면서 淸과 朝鮮 간의 국제관계가 보다 노골적으로 종속화되는 시점에서는 위기의식이 심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高宗은 임오군란 직후 金允植을 통해 발표한 교서에서 계속적인 개화의 진행을 표방하였고,37) 이러한 의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정적 실무를 담당하던 統理軍國事務衙門의 상위층에 개화지향적인 인물을 임명하고 있었다.38) 아울러 고종은 개별적으로 변법적 개화파에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면서 묄렌도르프39)의 권한을 삭탈하였고 淸國軍事顧問을 면직시키는 등의 개혁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렇게 되자 세상은 소위 開化黨에 의해 장악되는 듯 보였고 이에 반해 친청보수세력의 위기감은 상대적으로 상승되고 있었다.40) 아울러 청국이 조선에의 적극적인 간섭을 자제하는 상황이어서 국내외의 정세는 실질적으로 변법파에에 점차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開化黨에 위기는 다가오고 있었다. 우선 1883년 8월 20일 6務에서 6司로 조직을 개편할 때 민영익·이조년·한규직·심상훈 등이 실력자로 등장하고 東道西器論적인 입장을 지닌 김윤식·어윤중·박정양 등이 일선에서 밀려났다. 이후 統理軍國事務衙門에 협판으로 재직하고 있던 홍영식이 1884년 8월 20일부로 해임되었다. 아울러 한성판윤으로 일본에 유학한 사관생도와 새로 수입한 서양무기를 바탕으로 근대적인 군대양성에 몰두하던 錦陵尉 朴泳孝가 광주부윤으로 좌천되고, 양성한 군대 역시 병조에 흡수되어 버렸다. 국가기관에 종사하고 있던 변법파들이 실질적으로 거세가 된 것이다. 이는 민씨 척족이 통리군국사무아문을 중심으로 국제정세에 밝고 실무에 능통한 자파세력을 적극 활용하여 스스로를 강화해 나간 조치로, 결국 이들과 대립하던 변법적 개화파의 정치적 소외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41)
특히 이 시기에 김옥균은 국방력 강화를 목적으로 차관의 교섭을 위해 3차 도일을 하게 된다. 그 과정은 <약초>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나는 마침내 조정을 하직하고 다시 동경에 이르렀다. 맨 처음에 外務卿 井上馨을 만나 보았더니 그 언사와 기색이 前日(1·2차도일을 의미함-필자)과 달라지고 나에 대한 의심과 기피가 아울러 나타났다. 나는 비로소 竹添이 목인덕 무리의 모함에 의하여 이미 (일본정부에) 보고한 바를 알게 되었다. … 길게 변명할 것은 없지만 대개 사세로써 논하면 지난날 마음을 기울여 (차관을)일본에게 의뢰했던 계책은 내가 돌아가서 임금에게 고하고 정부에게 고한 것은 남을 속인 것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형세였다. 그래서 곧 실정을 들어 미국공사 빙험에게 상황을 의논하여 그의 주선으로 橫濱에 가서 머물러 있던 미국상인 모스를 미국에 파견하였다. 그는 영국에 가서 일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여러 나라들은 아직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 몰라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일본 제일국립은행의 澁澤榮一에게 그 일을 도모하여 십만원이나 이십만원을 대여받으려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외무경의 허락을 얻지 못해 할 수 없다고 운운하였다.42)
이와 같이 개화·개혁을 위해 재원을 확보하려던 그의 노력은 주변상황에 의해 물거품으로 돌아갔고,43) 當五錢의 주조를 둘러싸고 민씨척족·묄렌도르프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은 김옥균 개인 뿐만 아니라 변법파들이 가지고 있었던 당시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44)

2. 閔泳翊의 開化黨 이탈
1878년 19세의 나이로 세도재상이 된 민영익45)은 민씨척족에서 다은 세대의 정권창출을 책임진 영재였다. 그는 기득권을 지닌 인사에 걸맞지 않게 개화지향적인 인사와 어울리며 변화하고 있는 세계정세를 익히는 데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竹洞에 위치한 그의 ##에는 개화지향적인 인재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들을 竹洞八學士라 지칭하였다.46) 민영익은 1883년 7월에 朝鮮 報聘使 全權大臣이라는 직책으로 부사 홍영식·종사관 서광범 등을 대동하고 미국·영국·프랑스와 러시아를 차례로 방문하였다.47) 방문의 충격은 나는 암흑계에서 광명계로 갔다가 다시 암흑계로 돌아 왔다. 나는 아직 나의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으나 미구에 (이 길이)보여지기를 바란다라고 술회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48) 아울러 그는 복명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방문 후 소회를 국왕에게 呈上하게 된다. 그는 미국이 국토가 광대하고 평화와 문화가 세계제일 수준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군대는 보잘 것이 없고 국민은 流民과도 같다고 전제하였다. 동시에 러시아의 국력에 대하여 경탄하면서, 이들의 국력이 우리에게까지 미치기 전에 미리 이들의 보호를 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9) 사실 이러한 민영익의 견해는 聯美論50)을 축으로 외교정책을 운영하던 조선의 당시 외교상황과 상반되는 것이고, 특히 준거의 대상으로 일본을 설정하고 개화정책에 몰두하던 변법파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다음의 <약초>기사 두 건은 민영익의 구미순방을 계기로 변법파의 對閔泳翊觀이 현격하게 변화하게 되었음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그때 민영익은 사신으로 미국에 갔다가 구주를 두루 유람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뜻이 자못 방자해졌다. 여러 번 건백하였는데 그 중에 는 내가 찬성하는 것도 있었고 비판한 것도 있었다. (이에)민영익은 드디어 나에게 반대하는 뜻을 품게 되었으나, 나는 역시 그의 예보을 피해 더불어 다투지는 않았다.51)
민영익은 드디어 청당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는 밖으로 우리 당을 공격하여 배척할 계획을 세우고, 안으로는 민태호·민영목이 우리 당을 모험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러한 간계는) 날이 갈수록 심하였다.52)
민영익을 축으로 전개되던 온건한 개화정책에 어느 정도 기대를 갖고 있던 변법파에게 있어 그의 태도변화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어서,53) 민영익을 淸黨의 수괴로 지목하면서 서로를 利敵視하는 지경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54)
3.고종의 신임에 대한 자신감
고종은 당시 개화정책의 실질적 책임자였다. 전근대에 국왕이 갖는 권위를 감안하더라도 당시 지식인들에게 왕이 미치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55) 고종은 사상적으로는 東道西器論을, 외교방면에서는 聯美論을 중심으로 개화정책을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고, 이의 추진 세력으로 젊은 개화 지향적 인물을 지목, 이들을 중용하고 있었다. 고종의 이러한 태도는 실사구시적인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56) 변법파, 특히 대표격인 김옥균과 사실상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57) 따라서 갑신년에 들어 민씨척족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아 상황이 더욱 어려워진 가운데에도 이들 변법파는 결코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국왕 역시 그들을 근거리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관계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약초>11월 29일자 기사이다.58) 고종과 변법파와의 관계, 그들의 지향점,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 등을 잘 알 수 있으므로 인용해 보도록 하겠다.
부름을 받고 入對하였다. 마침 곁에 엿듣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옷깃을 여미고 일어나 절을 하고 아뢰기를 지금 천하의 대세는 날로 엉키고 있으니 국내정세도 날로 위태롭고 어지러워지는 형편임은 본디 전하께서 통촉하시는 바이오니, 지금 군더더기로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다시 한 번 자세히 이뢰고자 하는데 들으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주상은 좋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淸과 日本이 교전하고 있는 일, 日本과 淸國이 화합하지 못한 일, 露國의 동방정략이 날로 절박한 지경에 이른 일, 십여년 이래 서양 제국들이 동양을 향한 정략이 아주 변하여 옛
규범에 얽매여 안온하게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형세, 그리고 국내정치로 는 당오전의 폐단이 혹심하여 백성들이 지탱해 나갈 수 없고 穆麟德을 그릇 고용하여 실책이 많으며, 간신이 주상의 총명을 가리고 淸을 등에 업은 채 권세를 부리는 일 등을 거침없이 아?다(천만마디의 말을 다 기록할 수는 없다).… 주상께서 이르기를 경의 마음이 있는 곳을 내가 잘 알겠다. 무릇 국가의 대계에 관계되거나 위급할 일을 당할 때에는 경의 대책에 일임할 것이니 경은 다시 의심하지 말라라고 하셨다(이것은 진심이고 진정한 말씀이다).59)
위에서 알 수 있듯이 고종의 개화지향성은 당시 위기상황 속에 빠져 있다고 스스로를 생각하던 급진파에게 있어서 매우 큰 힘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주재 고위외교관들의 계속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60) 갑신정변을 추진한 것은 돌연한 일본의 지원의사 표명61)보다 왕의 지지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보다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12월 5일에 발표한 조각명단에서 23개의 주요지위 중 왕실관련인사가 무려 10명에 달하는 소위 宗室內閣을 구성한 것도 이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62) 이와 같이 왕의 지지가 언제 어느 상황이던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은 급격적인 변혁을 통한 정권의 획득을 합리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일종의 擬似現實主義者였던63) 그들은 정변의 와중에서 국왕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계속적으로 범하게 되고, 이는 그들이 제시한 현실성 없는 정책과 더불어 고종의 신임을 잃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결국 왕의 지지도 개화 지향적 상층부들의 참여도 모두 얻지 못한 그들에게 결국 남은 것은 외국으로의 망명뿐이었던 것이다.

Ⅳ.자료적 가치

<약초>는 우선 선행연구에서 지적되는 것처럼 갑신정변을 비롯한 해당 역사적 시기, 해당사건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 직접 남긴 자료란 면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아울러 이 자료는 당시 정변을 전후한 조선의 사정을 기록한 국내외의 어느 기록도 갖지 못하는 구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변별성을 갖는다. 하지만 서술된 내용이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제3자에 의해 객관적으로 검토되지 않았고, 기록 자체가 일기의 형태로 기록되었음에도 다분히 타인의 열람을 의식하여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서술되었기 때문에 기록 자체가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하기에는 다소의 문제점이 있다.
또한 <약초>에는 내용 중에는 다소의 錯誤가 발견된다. 이 점 때문에 <약초>가 자료로서 갖는 가치를 둘러싸고 관련 학자들이 활발한 연구를 펼친 바 있다. 초기에는 資料의 僞作 여부에 초점을 맞추어 논쟁이 전개되어 나간 반면에 최근에는 저술의 토대가 되는 원본이 존재하느냐에 관심이 옮겨진 것 같다.
사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 할 지라도 수개월이 지난 일을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술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정확한 서술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동료의 증언을 듣거나, 타인에 의해 당시의 일을 기록한 자료를 보는 것, 그리고 자기 나름의 참고 자료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김옥균 또한 사건에 관련하여 남겨진 자필메모를 확보하여 그것을 토대로 <약초>를 저술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의 기록은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준다. (明治)17년 경성변란의 시말에 관해서는 선생 스스로가 기록한 상세한 기사가 있으므로 좌측에 싣는다. 단 이 기사가 김옥균의 <갑신일록>과 大同小異한 것을 보면, 김옥균이 변란 후 일본에 피해 와서 선생의 댁에 숨어 있을 때 주로 김으로부터 들었던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64)
福澤諭吉이 저술하였다고 하는 明治十七年朝鮮京城變亂の始末(이후 변란시말)은 김옥균이 증언한 자료 이외에도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추후 증언을 보충하여 만들어진 문건이라고 전해진다.
<변란시말>과 <약초>가 겹치는 부분에 착오가 거의 발생하지 않고65) 서술체제와 내용이 거의 동일하므로 김옥균이 <변란시말>을 참조하여 <약초>를 저술하였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66)
김옥균은 자신의 관복 속에 연필을 넣고 필요한 사항을 기록하거나 문서를 작성하였다고 한다.67) 이렇게 주도면밀한 김옥균이 정변 당시 관련된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사실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정치적 복귀를 꿈꾸며 집도 가족도 버리고 혈혈단신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일부나마 관련자료를 분명히 소지하였을 것이고, 이것이 오히려 <변란시말>의 저술에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겠다. 따라서 <약초>의 저술이 단순히 기억의 의존이나 일본측 자료의 활용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견해는 재검토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주) ----
1) 山邊健太郞, 「甲申日錄の硏究」『朝鮮學報』17, 1961.
김사억, 「『갑신일록』에 대하여」『김옥균』(북한사회과학원, 1964).
李光麟, 「金玉均의「甲申日錄」에 대하여」『開化黨硏究』(一潮閣, 1973).
李光麟, 「金玉均의 著作物」『開化黨硏究』(일조각, 1973).
李光麟, 「金玉均全集解題」『金玉均全集』(亞細亞文化社, 1979).
李光麟, 「金玉均의 生涯와 開化思想」『한국의 근대사상』(삼성출판사, 1990).
趙一文譯註, 「甲申日錄解題」『甲申日錄』(建國大學校出版部, 1977).
康玲子, 「甲申政變の評價をめぐっ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22, 1980.
金奉珍, 「甲申日錄에 관한 一硏究」『韓國學報』42, 1986.
2) 개화사상의 분화에 있어서 상대되는 두 분파를 지칭하는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어의적 기준이 동일해야 한다는 주장은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즉, 穩健의 상대어는 過激이 더 적절하고 急進의 대칭개념은 漸進이 보다 타당하다고 판단된다(李完宰, 「開化思想의 槪念과 分化問題」『韓國學論叢』13, 1988, 205∼206쪽).
3)서재필, 「回顧 甲申政變」『갑신정변과 김옥균』(국제문화협회, 1947).
박영효, 「甲申政變」『新民』14, 1926.
이광수, 「박영효씨를 만난 이야기」『東光』, 1926(『李光洙全集』, 우신사, 1972에 재수록).
O. N Renny, China and Korea, Kelly & Walsh, 1988(柳永博譯, 『淸韓論』, 동방도서, 1989).
H. N, Allen, The Horace Newton Allen Manuscript Collection(金源模
譯, 『알렌의 일기:舊韓末激動期 悲史』, 단국대학교출판부, 1991).
R. Avison, 에비슨기념사업회譯, 『舊韓末秘錄』(대구대학교 출판부, 1984).
F. A 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London, 1920(申福龍譯註, 『韓國의 獨立運動』, 평민사, 1986).
F. H. Harrington, GOD, MAMMON and the JAPANESSE, The Universi-ty of Wisconsin, 1944(李光麟譯, 『開化期의 韓美關係』, 一潮閣, 1973).
4) 山邊은 日本 내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를 중심으로 작업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현재 국내소장판본에 대한 조사가 상대적으로 미흡하다. 金鳳珍은 主要版本·亞流版本·未收版本의 기준을 통해 분류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이 분류를 할 때의 문제는 현재 『갑신일록약초』라는 기록이
현재까지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현존하는 모든 본이 사본이라는데 있다. 따라서 어느 것이 주요 판본이고 아류 판본인지 그 기준점이 매우 모호하다.
5)본문은 楷書와 半草書를 이용하여 정서되었는데 일본식 약자가 등장하지 않는 점으로 보아 국내의 요원에 의해 필사된 듯 하다.
6)31군데의 흔적이 있다.
7)수정된 글자의 필체가 다른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다른 필사자에 의해 행해진 것 같고, 3군데의 흔적이 있다.
8)모두 31군데의 흔적이 있다.
9)윤병태교수는 장서각소장본이 원본이라 추정했지만(「藏書閣資料의 特性」『藏書閣의 歷史와 資料的 特性』,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141쪽) 재고할 만한 여지가 있다.
10)이후 나오는 판본의 서지사항은 千惠鳳, 『韓國書誌學』(民音社, 1992)과 『藏書閣圖書韓國版總目錄』의 분류기준에 맞춰 필자가 작성한 것이다.
11)김봉진, 앞의 논문, 100쪽;金容九, 『世界外交史』(서울大學校出版部, 1992), 318쪽.
12)김봉진, 앞의 논문, 98쪽.
13)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한 徐仲錫(호는 耕波)의 소장도서로, 死後에 경희대학교에 기증되어 耕波文庫로 분류·관리되어 오다 1995년 경희대 중앙도서관에서 통합·운영되고 있다.
14)사진 속의 생김새로 미루어 보아 20대 후반 내지 30대 초반에 찍은 것 같다. 전통 한복차림에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쓰고 있다.
15)申國柱, 「甲申政變에 대한 再評價」『甲申政變硏究』(韓國政治外交史學會, 1985), 180쪽.
16)山邊健太郞, 앞의 논문, 118쪽;申國柱, 앞의 논문, 180쪽. 하지만 김봉진은 판본을 검토한 결과 본문의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음을 들어 서로 다른 판본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김봉진, 앞의 논문, 98∼99쪽).
17)실제로 자료의 초입부에 明治九十年 四月 寫總理府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86년경 필사된 원본이 존재하나, 일단 인쇄본으로 연구자들에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위와 같이 분류하였다. 자료의 일면부터 余를 餘라고 지칭하는 등 교정의 잘못으로 발생한 듯한 誤字가 다수 산견되고 있음을 보아 위의 분류는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18) 山邊健太郞, 앞의 논문, 120쪽.
19) 몇 종의 日文 번역본도 존재하나 본고에서는 제외하였다.
20) 본문 중에 …第三期는 日露戰爭以後의 局面으로부터 日韓倂合調印까지의 三期… 운운하는 내용이 있고 사용된 원고지에 朝映·議政府撮影所 라고 인쇄되었다(『甲申政變記』, 2쪽).
21)申國柱는 국역저본이 경도대본이라고 주장했으나 (申國柱, 앞의 논문, 180쪽) 趙一文은 부인하고 있다(<조일문박사전화인터뷰>, 1997년 1월 21일).
22)김사억이 수집한 전사본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김사억, 「『갑신일록』에 대하여」『김옥균』, 북한사회과학원, 1964, 310쪽).
23)註 20)과 같음.
24)이 제목은 편집자가 자의적으로 붙인 제목일 것으로 생각된다.
25)김사억, 앞의 논문, 314∼315쪽
26)이 부분은 『日本外交文書』 및 『朝鮮交涉件錄』, 그리고 『舊韓國外交文書』第一卷 <日案1> 등에 중복·게재되어 있다. 아울러 갑신년의 기사는 『甲申日使往復抄』(寫本, 불분권1책, 16.5×17cm, 線裝)에도 실려 있다.
이 책의 표지 좌측상단에 錄이라는 大題가 붙어 있고 우측상단에는 甲申日使往復抄라는 글씨가 세필로 써 있다. 그리고 그 하단에는 前間氏所藏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국외유출자료로써 현재 일본 東洋文庫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를 1995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영인하여 보관하고 있다.
27)金玉均等逃竄日本…竟爲洪英植之子所刺 則洪英植作亂 或爲金玉均之所誘(『甲申事變案』, 240쪽)라 하여 춘추사관적 입장에서 글을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 사실과 틀린 기술이 있으므로 사료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28)생몰년미상. 譯官출신으로 본관은 草溪, 자는 大始, 호는 吉雲·蛛舡. 개화기에 武備自强을 위한 청나라에의 유학생 파견을 주선하기 위하여 請咨文을 가지고 1880년(고종 17) 別賚咨官으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이홍장과 4개조로 된 朝鮮國員辨來學製造操練章程을 체결하여 성공적인 외교교섭으로 유학생 파견을 가능케 하였다. 1881년 영선사 김윤식을 따라 청나라로 파견되어 군기제조학습을 위한 유학생단을 인솔하고 청나라로 건너가 그곳에 머물며 3차에 걸친 김윤식과 이홍장 회담에 배석하였다. 귀국 후 統理交涉商事務衙門 征<최0x7648>司의 참의를 거쳐 1884년 器械局辨이 되고 이어 지돈령부사·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姜在彦, 『韓國近代史硏究』, 한울, 1982; 李相一, 『雲養 金允植의 生涯와 思想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29)世系는 다음과 같다.
習敎 -- 尙容 - 光炫 - 壽氏 - 盛達 - 時潤 - 謙行 - 履積 - 厚根 - - 喬根 - 炳基 - 玉均
30)「吳世昌回顧錄」에 의하면 김옥균은 오경석의 사후에 유대치 등과 접촉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 때 김옥균의 나이가 20세 전후였다고 한다. 하지만 오경식이 1879년에 사망하였고 김옥균이 1851년생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古筠 金玉均 正傳』, 29∼31쪽).
31)이들이 최초로 접한 개화서적은 1책으로 된 『萬國史記』라고 한다. 한편 서재필은 오경석·유대치와의 접촉을 부인했는데 이는 老齡에서 오는 잘못된 기억인 듯하다(金道泰編, 『徐載弼博士 自敍傳 - 韓末史를 中心으로-』, 首善社, 1948, 60∼65쪽).
32) 이 때 『治道略論』을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33)妻 杞溪 兪氏사이에서 딸이 하나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福澤諭吉의 하녀였던 마쓰노 나까 사이에서 딸 스즈키 사다코를, 그리고 야마쿠치 나미 사이에서 아들 후시키치를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朝鮮日報』1926. 5. 12).
34)『新聞集成 明治編年史』제 6卷, 太學社, 1983(李光麟, 앞의 논문, 114쪽에서 재인용).
35)李光麟은 1885년 9월에서 12월 사이로 추정하였다(李光麟, 앞의 논문, 114쪽).
36)이른바 開化黨이라고 불리던 인사 중에는 갑신정변 발생시 주도세력에서 소외된 인사들이 있다. 尹雄烈·尹致昊 父子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변법적 개화파 사이에서도 정변을 분기점으로 세력의 분파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靑木功一은 이들 세력을 獨立黨 혹은 復興派로 구분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보다도 急進派란 용어가 좀더 적절치 않을까 한다(靑木功一, <朴泳孝の民本思想·新民論·民族革命論>(二)<朝鮮學報>82, 198쪽; 楊尙弦編, <韓國近代政治史硏究>, 사계절, 1985에 재수록).
37)嗚呼 予之否德 猥託民上 十有九年 不明厥德 政失民散 罪積于上…政令之從前不便於民者 悉令除之 擇循良之吏 以收群生 講究實效 思與一國更始(<承政院日記> 高宗 19年 7月 20日).
38)당시 통리군국사무아문의 운영은 당상관인 독판, 협판, 참의와 당하관인 주사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이 중 실무적 책임을 맡고 있던 협판에는 金允植·閔泳翊·朴定陽·魚允中 등이, 참의에는 洪泳植·申箕善·魚允中·徐光範 등이 재직하면서 開化政策을 구체화시켜 나가고 있었다(韓哲昊, <統理軍國事務衙門(1882∼1884)의 組織과 運營> <李基百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下, 1994, 1542∼1545쪽).
39)묄렌도르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W. Leifer 편, <묄렌도르프>(正民社, 1983).
P.G von Moellendorff: Ein Lebensbild, von R. von Moellendorff, 1930(申福龍·金雲卿 譯註, <묄렌도르프文書>, 평민사, 1987).
40)Harrington, ibid, p.19.
41)한철호, 위의 논문, 1551쪽.
42)余遂辭階 復至東京 初見外務卿井上馨 其言辭氣色 頓異前日 於我疑忌幷至 吾知竹添被穆輩之誣<황0x7C4B> 已有所報告 …固辨<노0x5A30><노0x5A30> 向日以傾意. 籍手于日本之策 歸告主上與政府者 悉歸誣罔矣 然其勢兩難 無復奈何 旣擧實狀議于米國公使빈감 得其周旋 以橫濱米國商人모스者 派于米國 乃至英國謨之 而因諸國不知朝鮮爲何之國 事不能如意 不得已遂對日本第一國立銀行澁澤榮一 一十萬或二十萬元 欲爲之貸與 然亦被外務卿不許成云(<甲申日錄略抄>2∼3쪽).
43)<약초>에서 김옥균은 차관교섭의 아무런 결과 없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은 목인덕과 민씨척족의 간계에 일본을 비롯한 각국의 관계자들이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근거해 김옥균의 삼차 도일이 국내보수세력과 결탁한 국제적 음모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는 주장을 펼치는 논자도 있다.
44)러시아에 대한 전통적인 경계의식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러시아와의 외교활동을 모색하려는 세력도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한규직·이조년·조정희 등이 露黨으로 분류되고 있다(井上角五郞, <漢城之殘夢>, 東京春陽書樓, 1891; 한상일역, <서울에 남겨둔 꿈>, 건국대학교출판부, 1993, 43쪽).
45)1877년 문과급제 후 淸華之職을 거쳐 1878년 이조참의가 되어 인사권을 장악하게 되었다(鄭玉子, <開化派와 甲申政變> <國史館論叢> 14, 1990, 212쪽).
46)遊泳翊之門者 時有八學士之目 李重七·趙同熙·洪英植·金興均·洪淳馨·沈相薰·金玉均·魚允中(黃鉉, <梅泉野錄> 卷一, 國史編纂委員會, 1957, 44쪽).
47)美國은 조선을 淸의 속국 정도로 취급하던 英國과는 달리 민영익의 귀국시 Foulk 해군소위를 호위무관으로 시종시킬 정도로-이는 淸과 日의경우에는 없었던 대우라고 한다-시종 開化勢力에 호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辛基碩, <韓末外交史硏究>, 一潮閣, 1967, 113쪽).
48)韓太涉編, <古均 金玉均正傳>, 1984, 110쪽.
49)<고균 김옥균 정전>, 11쪽.
50)聯美論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宋炳基, <19세기 말의 聯美論 硏究> <史學硏究> 28, 1978.
宋炳基, <聯美論의 進展과 初期의 開化政策> <藍史鄭在覺博士古稀紀念東洋學論叢>(고려원, 1984).
51)러시아 警戒論의 유래는 가까이는 일본·중국, 그리고 본원적으로는 西歐에서 유래한 것이다(洪停杓, <金玉均의 國際政治觀>,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0, 74∼89면).
52)閔泳翊卽爲淸黨之魁 外作功斥吾黨之計 內而閔台鎬閔泳穆誣陷之計日甚(<甲申日錄略抄>, 5쪽).
53)我大君主爲其薄有才辯 略通外國之情 寵之以顯官 待之以親信 閔參判泳翊 嘗面斥其短 爲逆黨所忌(<變亂事實> <甲申日使往復抄>, 26쪽).
54)개화정책에 있어서 민영익의 보조역할에 머물던 김옥균이 이에 불만을 품고 그에 부재를 틈타 주변세력을 포섭하여 일시에 개혁을 성취하려 했다는 견해는 다소 과장된 견해라고 생각된다(정옥자, 위의 논문, 213쪽). 그러나 갑신정변이 발발한 후 첫 희생자로 민영익이 지목되고, 개화당에서 이탈한 환관 유재현이 비참하게 살해된 것은 私怨이 개입한 #이라고 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점이 갑신정변 실패의 한 요인으로#지적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변 자체의 진보적 성격을 제어하는 측면이라고도 하겠다.
55)임오군란 이후 광범위하게 유생들은 동도서기론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는 고종의 교서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權五榮, <東道西器論의 構造와 그 展開>, <韓國史市民講座> 7, 一潮閣, 1990, 90∼93쪽).
56)見今時局日變 事務日增 舟車交涉之路 營疊設操練之場 其所接應 決非前日自守之可比 則何可膠執例套 印行冗節 不思所以實事求是乎(<高宗實錄>, 1884年 6月5日).
57)盖言今日之先務者 其必曰 用人才也 節材用也 抑奢侈也 擴開海禁而善隣交也 此周闕一而不可 然區區愚見以爲莫若實事求是…(治道略論, <金玉均全集>, 亞細亞文化社, 1979, 3쪽). 강상규도 이러한 점을 지적하였다(강상규, 앞의 논문, 46∼47쪽).
58)이 기사에 대해 田保校潔이나 山邊健太郞 등은 위조되었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田保校潔, <近代日朝關係史の硏究>, 937∼938쪽; 山邊健太郞, <甲申日錄の硏究> <朝鮮學報>17, 131쪽). 하지만 필자는 김봉진의 주장처럼 다소의 과장은 있으나 비교적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59)承召入對 適得傍聽無人 余<감0x53B7>襟起拜曰 今天下大勢之日葛藤 內國情況日臻危困 固屬殿下所燭知 今不必贅 臣竊欲更一備細陣達 肯聽否 上曰 可余因以淸佛交兵事 日淸不和事 露國東略日臻切迫之事 及十許年來 西洋諸國之向東洋政略頓變 不可拘守舊規 而安穩自守之勢 以至國中政治 如當五錢之爲酷弊 民不能支保 誤雇穆麟德 事多失着 奸臣壅蔽聰明 籍淸而權等事(千言萬言有不可記)…上曰 卿心所在吾實知之 凡關於國之大計 當危急之時 一任卿籌謀 卿勿更疑(此則實心實語)(<甲申日錄略抄> 11月 29日字, 27쪽).
60)<略抄>에 의하면 11월 14일에 Foote 美公使가, 11월 24일에는 Aston英領使와 Foote 美公使가 은인자중을 당부하였다 한다. <尹致昊日記>에도 11월 13일자와 19일자에 각각 Foote 美公使가 개화당의 은인자중을 부탁하였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61)일본의 <自由黨史>에 의하면 後藤象二郞와 板坦退助은 淸佛戰爭의 틈을 타 淸세력을 조선으로부터 추출하기로 하고 프랑스로부터 100萬圓의 차관과 군함 2척을 지원받아 조선의 정치개혁을 추진하게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을 後藤이 伊藤博文에게 발설을 하여 이후 일본은 조선에 적극적인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竹添進一郞은 1884년 10월 20일에 서울로 귀임한 후 변법파에 대한 적극적 지지를 호언하게 되는 것이다(김용구, <世界外交史>, 302∼303쪽).
62)개략적 상황은 다음과 같다.
領議政 李載元-고종의 從兄, 前後營使兼左捕將 朴泳孝-철종의 사위, 左贊成 李載冕-대원군의 자, 兵曹判書 李載元-고종의 종형, 判義禁 趙敬夏-대왕대비의 조카, 同副承旨 趙同冕-대왕대비의 종손, 兵曹參議 金文鉉-和順宮의 弟, 平安監司 李載純-대원군의 至親, 說書 趙漢國-대원군의 외손, 洗馬 李埈鎔-대원군의 장손.
63)주워진 상황이 어느 조건속에서든 큰 변화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마치 일제시대 현실주의자들이 식민통치가 항구적이라고 믿은 것처럼-과 이로 말미암은 왜곡된 현실판단을 통칭하여 擬似現實主義라 지칭한다(박광주, <현대한국정치와 정치이념:의사현실주의로서의 패권주의> <부산정치학학보> 2, 1989).
64)石河幹明, <先生手記の變亂始末> <福澤諭吉傳> 第三卷, 岩波書店, 312쪽.
65)<변란시말>에서 10월 30∼31일, 11월1∼7일, 10일, 20일, 25∼30일,12월1일, 4∼6일까지의 기사가 중복이 된다.
66)김봉진, 앞의 논문, 90∼94쪽.
67)김옥균이 위조한 것이냐 혹은 왕의 명령을 받아 대필한 것이냐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벌어졌던 日本公使來護朕이라는 국왕의 청병의뢰서가 古筠 품에서 꺼내진 종이와 연필로 쓰여진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尹孝定, <韓末秘史-最近六十年의 記錄->, 113쪽; 申國柱, <韓國近代政治思想史>, 探求堂, 1975, 274∼287쪽).



부가정보

甲申日錄略抄

전철기* 韓國精神文化硏究院 韓國學大學院 박사과정

Ⅰ.서지적 고찰

장서각도서번호 2-155
李王職實錄編纂委員會. 稿本(1900년경 필사).
不分卷 1책 55장. 四周雙邊. 半郭 22.5×18.6cm.
烏絲欄. 半葉 10行20字. 上黑魚尾. 27×19.6cm. 線裝.
印: 李王家圖書之印.

金玉均이 저술한 『甲申日錄略抄』(이하『略抄』로 표기)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주목되어 온 자료이다.1) 이 문헌은 金玉均의 생애연구에 필수적인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變法的·改良的 開化派2)의 形成·發展·分化過程, 그리고 甲申政變을 전후로 한 國內政治勢力의 推移와 國際政勢의 變化 등을 다른 어느 문헌보다 잘 나타내 준다.
하지만 原本이 존재하지 않고 國內外에 많은 異本이 유통하고 있지만 여러 판본을 수집·분석하는 기초적 작업은 소홀하였다. 또한 개인 기록이 갖는 한계를 인식하여 동시대의 內外國人에 의해 남겨진 기록3) 및 公文書類 등과 비교하면서 『약초』를 분석하는 작업 역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따라서 무엇보다 국내외에서 散見되고 있는 『略抄』의 각종 판본을 정리·분류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필자는 우선 국내외에 소장되어 있는 『약초』의 판본을 소개하고 이들 판본의 특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略抄』에 대해서는 山邊健太郞와 金鳳珍이 판본의 소개와 분류를 한 바 있다. 하지만 기존의 연구는 다소의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4) 사실 문건의 분류는 필사자료인가 출판자료인가라는 점과 문건의 소장처가 어디냐 하는 점, 두 가지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소장처에 따른 분류는 국가별, 그리고 개인소장과 기관소장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 여러 판본들을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1.韓國所藏資料
1)기관소장
①所藏閣本
표지에 甲申日錄全이라는 제호가 붙어있고, 본문의 첫머리가 甲申日錄略抄 金玉均著로 시작된다. 『약초』의 표기상 특징으로는 표점이 없고 측면에 李王職實錄編纂用紙라고 인쇄되어 있는 원고용지에 한문에 능통한 필사요원에 의해 만년필 혹은 펜을 가지고 정서되었다는 것이다.5) 그리고 46군데에 걸쳐 수정의 흔적이 발견되는데, 이는 잘못된 글자를 만년필로 지우고 수정한 경우와6) 붉은 글자로 고친 경우,7) 그리고 교정부호를 이용하여 글자를 삽입하는 경우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8) 다른 판본과는 달리 공공기관에서 주도하여 사본의 작성이 이루어진 점이 주목할 만 하다.9)
이외에도 藏書閣本은 다른 판본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선 주를 細字 처리해서 본문에 기입한 여타 판본과는 달리 괄호로 묶어 본문과 동일한 크기로 본문에 배열하였고, 소위 座次之圖라 불리는 우정국 연회 당시 좌석의 배열도가 席次之圖라 명명, 삽입되어 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타판본에서는 모두 12월 6일자에 포함된 내용이 12월 5일자에 배치되어 있는 사실에 있다. 入來云云…으로 시작하여 …竟至日暮로 끝나는 총 406자의 내용에는 淸의 通譯이 와서 원세개가 배알함을 원한다고 통고한 뒤 淸軍이 개입하고, 이에 대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밀리는 김옥균일파와 일본군의 모습, 그리고 인천으로의 피신을 논의하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내용상으로 보면 12월 6일자로 편집된 것이 정상인 듯 한데, 아마도 편찬과정에서 다른 판본과 비교·검토하는 과정 중에 발생한 실수가 아닌가 여겨진다.
②奎章閣本
분류번호 古4280-3
1935년 필사, 불분권 1책 42장, 27.5×19.5cm, 線裝.
印:京都帝國大學中央圖書館所藏
표점이 되어 있는데 일본식 약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에 의해 전사된 듯 하다.10) 원래는 京都大本이나 경성제국대학시절 이관되어 현재까지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 가장 잘 알려져 있는 판본이다.
③서울대中央圖書館本
京都大本을 저본으로 서울대 외교학과 金容九교수가 1960年代에 한학에 능통한 古老를 위촉, 京都大本을 銅版에 전사하여 필사한 것이다. 서지사항은 규장각본과 동일하다.11)

2)개인소장
①吳世昌本
寫本, 不分卷1冊, 四周雙邊, 半郭 18.9×12.7cm, 藍格<초0x75F9>本, 半葉 10行 20字, 內向黑魚尾, 23×16cm, 線裝. 楷書體로 단정히 필사되었고 1962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되어 현재 葦滄文庫로 분류·소장되어 있으며, 분류기호는 <古216-2>이다. 藏書閣에 원본을 촬영한 마이크로필름이 소장되어 있다. 장서각본이 토대가 되어 필사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12) 필자가 확인해 본 결과 사실과 다르다. 여러 자료를 비교·검토하며 필사한 듯, 매우 정치하여 주목해 보아야 할 판본이다.

② 李瑄根本
謄寫本, 32.4×21cm, 無界, 半葉 10行 23字.
내용을 검토해 보니 경도대본과 동일하다. 다만 밝혀지지 않은 부분은 소장자가 상기 도서의 원본을 어떻게 소장하게 되었느냐는 점이다.
일본에서 직접 필사했거나 아니면 해방 이후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를 필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소장자가 植民地時期에 정규 교육를 통해 역사학을 정식으로 전공한 사실을 감안할 때, 전자가 보다 많은 가능성을 가지지 않을까 한다. 표점이 되어 있고, 경도대본에서 일본식 약자로 되어 있는 문구를 모두 정자로 바꾸어 놓았다.

③ 徐仲錫本13)
不分卷 1책49장, 四周雙邊, 半郭 19.7×13.3cm, 藍格<초0x75F9>本, 半葉 10行 18字, 內向黑魚尾.
책의 두 번째 장에 김옥균의 흑백사진14)이 붙어 있고 본문의 첫장에 金玉均日記 甲申日錄이라 쓰여져 있다. 장서각본처럼 주를 괄호 속에 넣어 본문에 배열하였다. 푸른색 잉크를 사용하여 필사하였고, 필사된 지면에 開城(廣昌紙物鋪謹製) 百濟라고 인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식민지 시대, 최소한 한국전쟁 이전에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내에 소개된 판본 중 내용이 가장 소략하고 誤字가 다수 산견된다.

2. 日本所藏資料

1) 기관소장

① 京都大本
서지사항이나 내용은 규장각본과 동일하다.
②東洋文庫本(미입수)
幣原坦의 藏本을 기증받아 소장하게 되었다고 전해진다.15) 비교적 정치한 본으로 알려져 있다.
③靜嘉堂文庫本(미입수)
비서유찬본을 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6)
2)개인소장
稻沼端穗本(미입수)
1887년에 필사되어 소장자가 입수한 것으로 필사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고 하나 일부의 낙장이 있다고 전해진다.
3.出版本
1)韓國出版
亞細亞文化社本:『金玉均全集』에 실려있는 것으로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경도대본을 1979년에 영인·출판하였다. 표지글자나 분문의 글자가 동일하다. 이외에도 「治道略論」등 8편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
2)日本出版
伊藤博文 秘書類簒 朝鮮交涉資料本17):39면으로 되어 있으며 상기도서 上卷에 실려 있다. 일본에 소개된 『略抄』의 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써 金玉均自書日記라는 대제목 하에 甲申日錄略抄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3)中國出版
中國近代史資料叢刊本(미입수):「金玉均甲申日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내용은 비서유찬본과 동일하다고 한다.18)
4.國譯本19)
1)『甲申政變記』:저자미상, 불분권 1책 109장, 1909년(추정)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로 현재 나와 있는 번역본 중 最古本으로 추측된다. 책의 첫장에 隆熙三年 七月 日;明治四十二年七月 日이라고 붓으로 필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09년경부터 저술이 시작되어 1910년 이후에 탈고한 것으로 짐작된다.20) 원본을 정확하게 국역하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약초』를 저본으로하여 기술했을 것으로 판단되며, 중간 중간 원본에 없는 내용이 부가된 것으로 보아 『약초』를 보완하는 자료적 기능도 어느 정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47, 48, 55장이 각각 누락되어 있다.
2) 金永鎭, 「甲申日記」(민태원, 『甲申政變과 金玉均』, 國際文化協會, 1947)
총 49면이 게재되어 있다. 책의 권두의 화보 속에서 김옥균 자필로 쓰여졌다는 座次之圖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저자가 원본을 입수, 이를 토대로 국역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3) 김옥균외, 『한국의 개화사상』, 삼성출판사, 1990.
분량은 총64면으로 한학자인 李民樹에 의해 국역되었다. 번역의 저본이 어떤 본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동일한 인물이 해제를 쓴 『金玉均全集』에 경도대본이 실린 것으로 보아, 이 책도 역시 동일한 대본을 토대로 국역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4)趙一文譯註, 『甲申日錄』, 建國大學校 出版部, 1977.
원문 42면과 함께 약간의 주석을 단 번역문 84면이 실려 있다. 간행사에 이 책은 이선근 소장본과 동양문고 소장본을 대조하여 국역이 진행되었다고 기재되어 있다.21) 하지만 책의 뒷 부분에 게재된 내용은 경도대본과 상당히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
5.『甲申日錄略抄』의 제호
①甲申日錄(京都大, 奎章閣, 서울대 中央圖書館)
②甲申日記(김영진 번역본)
③甲申日記錄(갑신정변기)
④甲申日錄(발견치 못함)22)
⑤甲申日錄略抄(장서각, 비서유찬, 오세창)
⑥金玉均手書日記(발견치 못함)23)
⑦金玉均自書日記(비서유찬본)24)
⑧金玉均甲申日記(중국근대사자료총서)
⑨金玉均日記 甲申日錄(서중석)
위의 열거된 제목을 살펴보면 갑신일록라는 제호가 제일 많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문건이 京都大本을 토대로 필사된 것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갑신일록약초라는 제목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김사억의 주장처럼 저본이 된 일기가 존재하고 그것에서 초략한 내용이기 때문에 이를 원제목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25) 국내외에 걸친 다양한 소장본에서 갑신일록약초라는 제호를 사용한 것은 우연이라고 볼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따라서 차후 자료에 대한 호칭은 종전과는 다르게 사용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편, 『약초』를 검토하고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는 對照資料로 위에서 소개한 각종 문건 이외에 『尹治昊日記』와 福澤諭吉의 「明治十七年 朝鮮京城變亂の始末」등이 선행연구자들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이와 더불어 활용할 수 있는 자료로 아래의 자료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甲申政變案』:寫本, 不分卷 1冊 172장, 四周單邊, 半郭 21.4×15cm, 烏絲欄, 半葉 10行 19字, 25×17cm. 線裝. 霞城文庫에 소장되어 있는 유일본으로 새로 발견된 자료이다. 甲申政變이 실패로 돌아가고 참가세력이 仁川으로 철수한 뒤 韓日關係者들이 이의 수습을 위해 진행하였던 소위 書面外交에서 양측간에 甲申·乙酉·丙戌(1884∼1886) 삼년에 걸쳐 주고 받았던 서찰을 수록한 책이다.26) 아울러 권두에는 갑신정변의 관변기록인 甲申變亂事實이 실려 있다. 아울러 책의 후미에는 中東戰記<초0x75F9>錄이라는 제호의 글이 게재되어 있다. <誅叛記>와 <追紀 叛臣> 두 부분으로 구성된 이 글은 開化黨의 形成, 新舊勢力의 갈등과 갑신정변의 발생, 정변의 실패 후 주도세력의 도주와 한일양국의 협상과정이 서술되어 있다. 특히 金玉均의 暗殺을 담당했던 洪鍾宇와 암살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고 있다. 27) 내표지에 이선근 박사의 친필로 卞元圭28)家 所藏이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책의 편집과 서술은 변원규가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Ⅱ.편찬경위
1.저자
김옥균은 忠淸道 公州에서 安東人 金炳台와 靈光 宋氏사이의 장남으로 1851년(哲宗 2)에 태어났다.29) 자는 伯溫, 호는 古愚·古筠이다. 7세 때 당숙인 金炳基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기를 거쳤다. 그 후 양부인 炳基가 강릉부사가 되자 그를 따라 임지로 가서 栗谷祠堂에서 사사하였다. 청년기에 朴珪壽의 문하에서 사사하면서30) 劉鴻基 등과의 교류를 통해 개화사상을 접하였다.31) 1872년 알성문과에 자원으로 급제하여 관문에 들어섰고, 1874년 弘文館校理로 임명되었다.
일찍이 개화승인 李東仁을 통해 일본의 발전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스스로 일본의 근대화를 살펴보기 위하여 3차에 걸쳐 도일하였다. 1차 도일은 1881년 음력 12월로 임오군란의 발생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귀국 직후에 당시 조선과 일본이 공통적으로 지향해야 할 문제를 서술했다고 추정되는 『箕和近事』를 편찬하였다. 이후 承政院右副承旨·參議交涉通商事務·吏曹參議·戶曹參判·外衙門協辨 등을 역임하였다. 임오군란 직후 1882년 수신사 박영효의 고문자격으로 2차 도일을 하여 徐光範 등과 함께 徐載弼 등의 본국유학생을 日本陸軍士官學校 등에 입학시키고, 福澤諭吉·後藤象次郞 등의 일본측 인사와 교류하면서 조선의 근대화에 대해 협의하였다.32) 1883년 6월 국왕의 위임장을 들고 국채모집을 위해 3차로 도일하여 日本·美國·英國의 관계자와 접촉하였으나 실패하고 아무 성과없이 귀국하게 되었다.
후에 下向式 開化·改革을 위해서는 强制的 措値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1884년 12월 4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꾀하였다. 결국 이는 실패로 돌아가고, 같은 해 12월 9일 김옥균은 朴泳孝·서재필 등 주도세력 9인과 함께 일본 우편선 千歲丸 편으로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이 후 일본에 대한 배신감을 폭로하고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회복할 목적으로 『甲申日錄略抄』를 저술하게 된다.
한편, 김옥균은 舊自由黨 출신인 玄洋社 系列의 일본 극우파와 國內의 大院君 勢力 등과 결탁, 정치적 복귀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재기를 위한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정부에 부담이 되어 小笠原島에 유배가 되기도 하였다.
김옥균은 본국 내의 보수세력에 의해 계속적인 위협에 시달렸는데, 1886년 5월 統理軍國事務衙門 主事인 池運永이 파견되어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李鴻章과 三和主義에 입각하여 東洋平和를 논하여 보겠다는 생각을 지닌 김옥균은 李逸稷·洪鍾宇·和田延次郞 등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결국 1894년 3월 28일 上海 美國租界內의 일본여관인 東和洋行에서 근왕주의자인 홍종우에 의해 암살된다.
이후 조선정부는 국내로 들어온 김옥균의 시신을 楊和津에서 능지처참하여 전국에 효시하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일본의 친지들은 金氏友人會를 組織, 東京의 本願寺에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1910년(융희 4)에 特贈正一品大匡輔國崇祿大夫奎章閣大提學에 추증되었고, 忠達이라는 諡號를 받으며 공식적으로 복권이 된다.33)

2.저술연대
김옥균이 『약초』를 저술한 시기는 아래의 『朝野新聞』(1885년 9월 5일자)기사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同씨는 我邦에 逃亡하여 와서 橫濱·神戶 等地에 流寓하였지만 요사이는 銀座附近에 寓居하여 전혀 來客을 謝絶하고 붓을 幽窓 밑에서 弄하면서 지금까지 겪은 岐嶇한 일들을 著述하고 있다는 소식, 완성되면 반드시 새로운 事實도 많을 것으로 생각한다.34)
위의 기사를 보건대 김옥균은 1885년 9월 이전에 칩거하면서 『약초』의 저술에 들어갔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李文忠公全書』『寄漢城袁道』 光緖十二年正月初九日辰刻(1886. 2. 12 오전8시경)에 나는 김옥균의 일기를 얻었다(…我得金玉均日記…)라는 내용이 있다. 따라서 당시 중국측 인사가 일본에서 『약초』를 취득하고 이를 배편으로 중국까지 발송하는 시간을 감안해보면 적어도 1886년 1월을 전후한 시기에 원고는 탈고된 것으로 생각된다.35)
Ⅲ.편찬체제와 내용
총 13,737자로 이루어진 『약초』는 壬年 11월(1882. 12)에서 시작되어 甲申年 12월 6일자로 끝을 맺는다. 형태상으로 볼 때 1882년 12월부터 1884년 10월까지는 회상기의 형식이고, 1884년 10월 30일부터는 일기체의 형식으로 양분해 볼 수 있다.
내용상으로 보면 임오년에 국왕의 명령으로 일본을 다녀온 뒤부터 시작하여 閔氏戚族이 중심이 된 보수세력과 當五錢의 鑄造를 둘러싸고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 그리고 당시 일본측 인사들과 조선의 정치적 상황에 대하여 협의하면서 병역지원에 관해 논의하고 자파세력과 어울려 정변을 준비하던 과정을 기록한 부분, 그리고 갑신정변 3일 동안의 사건을 기록한 부분 등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변법적 개화파의 위기의식 심화
1884년 당시 변법적 개화파(이후 변법파)36)들은 당시 정치적 상황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사실 임오군란 이후 대원군이 天津으로 납치되고 中國朝鮮商民水陸貿易章程이 체결되면서 淸과 朝鮮 간의 국제관계가 보다 노골적으로 종속화되는 시점에서는 위기의식이 심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高宗은 임오군란 직후 金允植을 통해 발표한 교서에서 계속적인 개화의 진행을 표방하였고,37) 이러한 의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정적 실무를 담당하던 統理軍國事務衙門의 상위층에 개화지향적인 인물을 임명하고 있었다.38) 아울러 고종은 개별적으로 변법적 개화파에게 친근한 태도를 보이면서 묄렌도르프39)의 권한을 삭탈하였고 淸國軍事顧問을 면직시키는 등의 개혁조치를 단행하였다.
이렇게 되자 세상은 소위 開化黨에 의해 장악되는 듯 보였고 이에 반해 친청보수세력의 위기감은 상대적으로 상승되고 있었다.40) 아울러 청국이 조선에의 적극적인 간섭을 자제하는 상황이어서 국내외의 정세는 실질적으로 변법파에에 점차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開化黨에 위기는 다가오고 있었다. 우선 1883년 8월 20일 6務에서 6司로 조직을 개편할 때 민영익·이조년·한규직·심상훈 등이 실력자로 등장하고 東道西器論적인 입장을 지닌 김윤식·어윤중·박정양 등이 일선에서 밀려났다. 이후 統理軍國事務衙門에 협판으로 재직하고 있던 홍영식이 1884년 8월 20일부로 해임되었다. 아울러 한성판윤으로 일본에 유학한 사관생도와 새로 수입한 서양무기를 바탕으로 근대적인 군대양성에 몰두하던 錦陵尉 朴泳孝가 광주부윤으로 좌천되고, 양성한 군대 역시 병조에 흡수되어 버렸다. 국가기관에 종사하고 있던 변법파들이 실질적으로 거세가 된 것이다. 이는 민씨 척족이 통리군국사무아문을 중심으로 국제정세에 밝고 실무에 능통한 자파세력을 적극 활용하여 스스로를 강화해 나간 조치로, 결국 이들과 대립하던 변법적 개화파의 정치적 소외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41)
특히 이 시기에 김옥균은 국방력 강화를 목적으로 차관의 교섭을 위해 3차 도일을 하게 된다. 그 과정은 <약초>에 다음과 같이 나타나고 있다.
나는 마침내 조정을 하직하고 다시 동경에 이르렀다. 맨 처음에 外務卿 井上馨을 만나 보았더니 그 언사와 기색이 前日(1·2차도일을 의미함-필자)과 달라지고 나에 대한 의심과 기피가 아울러 나타났다. 나는 비로소 竹添이 목인덕 무리의 모함에 의하여 이미 (일본정부에) 보고한 바를 알게 되었다. … 길게 변명할 것은 없지만 대개 사세로써 논하면 지난날 마음을 기울여 (차관을)일본에게 의뢰했던 계책은 내가 돌아가서 임금에게 고하고 정부에게 고한 것은 남을 속인 것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할 수 없는 형세였다. 그래서 곧 실정을 들어 미국공사 빙험에게 상황을 의논하여 그의 주선으로 橫濱에 가서 머물러 있던 미국상인 모스를 미국에 파견하였다. 그는 영국에 가서 일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여러 나라들은 아직 조선이 어떤 나라인지 몰라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일본 제일국립은행의 澁澤榮一에게 그 일을 도모하여 십만원이나 이십만원을 대여받으려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외무경의 허락을 얻지 못해 할 수 없다고 운운하였다.42)
이와 같이 개화·개혁을 위해 재원을 확보하려던 그의 노력은 주변상황에 의해 물거품으로 돌아갔고,43) 當五錢의 주조를 둘러싸고 민씨척족·묄렌도르프 사이에 벌어졌던 갈등은 김옥균 개인 뿐만 아니라 변법파들이 가지고 있었던 당시 상황에 대한 위기의식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하였다.44)

2. 閔泳翊의 開化黨 이탈
1878년 19세의 나이로 세도재상이 된 민영익45)은 민씨척족에서 다은 세대의 정권창출을 책임진 영재였다. 그는 기득권을 지닌 인사에 걸맞지 않게 개화지향적인 인사와 어울리며 변화하고 있는 세계정세를 익히는 데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竹洞에 위치한 그의 ##에는 개화지향적인 인재들이 많이 모여들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들을 竹洞八學士라 지칭하였다.46) 민영익은 1883년 7월에 朝鮮 報聘使 全權大臣이라는 직책으로 부사 홍영식·종사관 서광범 등을 대동하고 미국·영국·프랑스와 러시아를 차례로 방문하였다.47) 방문의 충격은 나는 암흑계에서 광명계로 갔다가 다시 암흑계로 돌아 왔다. 나는 아직 나의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으나 미구에 (이 길이)보여지기를 바란다라고 술회할 만큼 엄청난 것이었다.48) 아울러 그는 복명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방문 후 소회를 국왕에게 呈上하게 된다. 그는 미국이 국토가 광대하고 평화와 문화가 세계제일 수준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군대는 보잘 것이 없고 국민은 流民과도 같다고 전제하였다. 동시에 러시아의 국력에 대하여 경탄하면서, 이들의 국력이 우리에게까지 미치기 전에 미리 이들의 보호를 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49) 사실 이러한 민영익의 견해는 聯美論50)을 축으로 외교정책을 운영하던 조선의 당시 외교상황과 상반되는 것이고, 특히 준거의 대상으로 일본을 설정하고 개화정책에 몰두하던 변법파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다음의 <약초>기사 두 건은 민영익의 구미순방을 계기로 변법파의 對閔泳翊觀이 현격하게 변화하게 되었음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그때 민영익은 사신으로 미국에 갔다가 구주를 두루 유람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뜻이 자못 방자해졌다. 여러 번 건백하였는데 그 중에 는 내가 찬성하는 것도 있었고 비판한 것도 있었다. (이에)민영익은 드디어 나에게 반대하는 뜻을 품게 되었으나, 나는 역시 그의 예보을 피해 더불어 다투지는 않았다.51)
민영익은 드디어 청당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는 밖으로 우리 당을 공격하여 배척할 계획을 세우고, 안으로는 민태호·민영목이 우리 당을 모험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러한 간계는) 날이 갈수록 심하였다.52)
민영익을 축으로 전개되던 온건한 개화정책에 어느 정도 기대를 갖고 있던 변법파에게 있어 그의 태도변화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어서,53) 민영익을 淸黨의 수괴로 지목하면서 서로를 利敵視하는 지경에 이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54)
3.고종의 신임에 대한 자신감
고종은 당시 개화정책의 실질적 책임자였다. 전근대에 국왕이 갖는 권위를 감안하더라도 당시 지식인들에게 왕이 미치던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55) 고종은 사상적으로는 東道西器論을, 외교방면에서는 聯美論을 중심으로 개화정책을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고, 이의 추진 세력으로 젊은 개화 지향적 인물을 지목, 이들을 중용하고 있었다. 고종의 이러한 태도는 실사구시적인 사고에 근거한 것으로,56) 변법파, 특히 대표격인 김옥균과 사실상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57) 따라서 갑신년에 들어 민씨척족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아 상황이 더욱 어려워진 가운데에도 이들 변법파는 결코 국왕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국왕 역시 그들을 근거리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그들의 관계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 <약초>11월 29일자 기사이다.58) 고종과 변법파와의 관계, 그들의 지향점,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 등을 잘 알 수 있으므로 인용해 보도록 하겠다.
부름을 받고 入對하였다. 마침 곁에 엿듣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옷깃을 여미고 일어나 절을 하고 아뢰기를 지금 천하의 대세는 날로 엉키고 있으니 국내정세도 날로 위태롭고 어지러워지는 형편임은 본디 전하께서 통촉하시는 바이오니, 지금 군더더기로 말씀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신이 다시 한 번 자세히 이뢰고자 하는데 들으시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주상은 좋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나는 淸과 日本이 교전하고 있는 일, 日本과 淸國이 화합하지 못한 일, 露國의 동방정략이 날로 절박한 지경에 이른 일, 십여년 이래 서양 제국들이 동양을 향한 정략이 아주 변하여 옛
규범에 얽매여 안온하게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형세, 그리고 국내정치로 는 당오전의 폐단이 혹심하여 백성들이 지탱해 나갈 수 없고 穆麟德을 그릇 고용하여 실책이 많으며, 간신이 주상의 총명을 가리고 淸을 등에 업은 채 권세를 부리는 일 등을 거침없이 아?다(천만마디의 말을 다 기록할 수는 없다).… 주상께서 이르기를 경의 마음이 있는 곳을 내가 잘 알겠다. 무릇 국가의 대계에 관계되거나 위급할 일을 당할 때에는 경의 대책에 일임할 것이니 경은 다시 의심하지 말라라고 하셨다(이것은 진심이고 진정한 말씀이다).59)
위에서 알 수 있듯이 고종의 개화지향성은 당시 위기상황 속에 빠져 있다고 스스로를 생각하던 급진파에게 있어서 매우 큰 힘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주재 고위외교관들의 계속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60) 갑신정변을 추진한 것은 돌연한 일본의 지원의사 표명61)보다 왕의 지지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보다 중요한 원인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12월 5일에 발표한 조각명단에서 23개의 주요지위 중 왕실관련인사가 무려 10명에 달하는 소위 宗室內閣을 구성한 것도 이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62) 이와 같이 왕의 지지가 언제 어느 상황이던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은 급격적인 변혁을 통한 정권의 획득을 합리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일종의 擬似現實主義者였던63) 그들은 정변의 와중에서 국왕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계속적으로 범하게 되고, 이는 그들이 제시한 현실성 없는 정책과 더불어 고종의 신임을 잃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결국 왕의 지지도 개화 지향적 상층부들의 참여도 모두 얻지 못한 그들에게 결국 남은 것은 외국으로의 망명뿐이었던 것이다.

Ⅳ.자료적 가치

<약초>는 우선 선행연구에서 지적되는 것처럼 갑신정변을 비롯한 해당 역사적 시기, 해당사건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던 인물이 직접 남긴 자료란 면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아울러 이 자료는 당시 정변을 전후한 조선의 사정을 기록한 국내외의 어느 기록도 갖지 못하는 구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변별성을 갖는다. 하지만 서술된 내용이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제3자에 의해 객관적으로 검토되지 않았고, 기록 자체가 일기의 형태로 기록되었음에도 다분히 타인의 열람을 의식하여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서술되었기 때문에 기록 자체가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하기에는 다소의 문제점이 있다.
또한 <약초>에는 내용 중에는 다소의 錯誤가 발견된다. 이 점 때문에 <약초>가 자료로서 갖는 가치를 둘러싸고 관련 학자들이 활발한 연구를 펼친 바 있다. 초기에는 資料의 僞作 여부에 초점을 맞추어 논쟁이 전개되어 나간 반면에 최근에는 저술의 토대가 되는 원본이 존재하느냐에 관심이 옮겨진 것 같다.
사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 할 지라도 수개월이 지난 일을 날짜와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술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따라서 어느 정도 정확한 서술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동료의 증언을 듣거나, 타인에 의해 당시의 일을 기록한 자료를 보는 것, 그리고 자기 나름의 참고 자료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김옥균 또한 사건에 관련하여 남겨진 자필메모를 확보하여 그것을 토대로 <약초>를 저술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래의 기록은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준다. (明治)17년 경성변란의 시말에 관해서는 선생 스스로가 기록한 상세한 기사가 있으므로 좌측에 싣는다. 단 이 기사가 김옥균의 <갑신일록>과 大同小異한 것을 보면, 김옥균이 변란 후 일본에 피해 와서 선생의 댁에 숨어 있을 때 주로 김으로부터 들었던 사실에 근거하여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64)
福澤諭吉이 저술하였다고 하는 明治十七年朝鮮京城變亂の始末(이후 변란시말)은 김옥균이 증언한 자료 이외에도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추후 증언을 보충하여 만들어진 문건이라고 전해진다.
<변란시말>과 <약초>가 겹치는 부분에 착오가 거의 발생하지 않고65) 서술체제와 내용이 거의 동일하므로 김옥균이 <변란시말>을 참조하여 <약초>를 저술하였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66)
김옥균은 자신의 관복 속에 연필을 넣고 필요한 사항을 기록하거나 문서를 작성하였다고 한다.67) 이렇게 주도면밀한 김옥균이 정변 당시 관련된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사실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정치적 복귀를 꿈꾸며 집도 가족도 버리고 혈혈단신 일본으로 망명한 그는 일부나마 관련자료를 분명히 소지하였을 것이고, 이것이 오히려 <변란시말>의 저술에 중요한 근거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하겠다. 따라서 <약초>의 저술이 단순히 기억의 의존이나 일본측 자료의 활용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견해는 재검토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한다.

주) ----
1) 山邊健太郞, 「甲申日錄の硏究」『朝鮮學報』17, 1961.
김사억, 「『갑신일록』에 대하여」『김옥균』(북한사회과학원, 1964).
李光麟, 「金玉均의「甲申日錄」에 대하여」『開化黨硏究』(一潮閣, 1973).
李光麟, 「金玉均의 著作物」『開化黨硏究』(일조각, 1973).
李光麟, 「金玉均全集解題」『金玉均全集』(亞細亞文化社, 1979).
李光麟, 「金玉均의 生涯와 開化思想」『한국의 근대사상』(삼성출판사, 1990).
趙一文譯註, 「甲申日錄解題」『甲申日錄』(建國大學校出版部, 1977).
康玲子, 「甲申政變の評價をめぐって」『朝鮮史硏究會論文集』22, 1980.
金奉珍, 「甲申日錄에 관한 一硏究」『韓國學報』42, 1986.
2) 개화사상의 분화에 있어서 상대되는 두 분파를 지칭하는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어의적 기준이 동일해야 한다는 주장은 음미할 만한 가치가 있다. 즉, 穩健의 상대어는 過激이 더 적절하고 急進의 대칭개념은 漸進이 보다 타당하다고 판단된다(李完宰, 「開化思想의 槪念과 分化問題」『韓國學論叢』13, 1988, 205∼206쪽).
3)서재필, 「回顧 甲申政變」『갑신정변과 김옥균』(국제문화협회, 1947).
박영효, 「甲申政變」『新民』14, 1926.
이광수, 「박영효씨를 만난 이야기」『東光』, 1926(『李光洙全集』, 우신사, 1972에 재수록).
O. N Renny, China and Korea, Kelly & Walsh, 1988(柳永博譯, 『淸韓論』, 동방도서, 1989).
H. N, Allen, The Horace Newton Allen Manuscript Collection(金源模
譯, 『알렌의 일기:舊韓末激動期 悲史』, 단국대학교출판부, 1991).
R. Avison, 에비슨기념사업회譯, 『舊韓末秘錄』(대구대학교 출판부, 1984).
F. A Mckenzie, Korea's fight for freedom, London, 1920(申福龍譯註, 『韓國의 獨立運動』, 평민사, 1986).
F. H. Harrington, GOD, MAMMON and the JAPANESSE, The Universi-ty of Wisconsin, 1944(李光麟譯, 『開化期의 韓美關係』, 一潮閣, 1973).
4) 山邊은 日本 내에 소장되어 있는 자료를 중심으로 작업을 진행하였기 때문에 현재 국내소장판본에 대한 조사가 상대적으로 미흡하다. 金鳳珍은 主要版本·亞流版本·未收版本의 기준을 통해 분류를 시도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이 분류를 할 때의 문제는 현재 『갑신일록약초』라는 기록이
현재까지 원본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현존하는 모든 본이 사본이라는데 있다. 따라서 어느 것이 주요 판본이고 아류 판본인지 그 기준점이 매우 모호하다.
5)본문은 楷書와 半草書를 이용하여 정서되었는데 일본식 약자가 등장하지 않는 점으로 보아 국내의 요원에 의해 필사된 듯 하다.
6)31군데의 흔적이 있다.
7)수정된 글자의 필체가 다른 점으로 미루어 보아 다른 필사자에 의해 행해진 것 같고, 3군데의 흔적이 있다.
8)모두 31군데의 흔적이 있다.
9)윤병태교수는 장서각소장본이 원본이라 추정했지만(「藏書閣資料의 特性」『藏書閣의 歷史와 資料的 特性』,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141쪽) 재고할 만한 여지가 있다.
10)이후 나오는 판본의 서지사항은 千惠鳳, 『韓國書誌學』(民音社, 1992)과 『藏書閣圖書韓國版總目錄』의 분류기준에 맞춰 필자가 작성한 것이다.
11)김봉진, 앞의 논문, 100쪽;金容九, 『世界外交史』(서울大學校出版部, 1992), 318쪽.
12)김봉진, 앞의 논문, 98쪽.
13)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한 徐仲錫(호는 耕波)의 소장도서로, 死後에 경희대학교에 기증되어 耕波文庫로 분류·관리되어 오다 1995년 경희대 중앙도서관에서 통합·운영되고 있다.
14)사진 속의 생김새로 미루어 보아 20대 후반 내지 30대 초반에 찍은 것 같다. 전통 한복차림에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쓰고 있다.
15)申國柱, 「甲申政變에 대한 再評價」『甲申政變硏究』(韓國政治外交史學會, 1985), 180쪽.
16)山邊健太郞, 앞의 논문, 118쪽;申國柱, 앞의 논문, 180쪽. 하지만 김봉진은 판본을 검토한 결과 본문의 내용에 다소 차이가 있음을 들어 서로 다른 판본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김봉진, 앞의 논문, 98∼99쪽).
17)실제로 자료의 초입부에 明治九十年 四月 寫總理府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886년경 필사된 원본이 존재하나, 일단 인쇄본으로 연구자들에게 소개되었기 때문에 위와 같이 분류하였다. 자료의 일면부터 余를 餘라고 지칭하는 등 교정의 잘못으로 발생한 듯한 誤字가 다수 산견되고 있음을 보아 위의 분류는 더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18) 山邊健太郞, 앞의 논문, 120쪽.
19) 몇 종의 日文 번역본도 존재하나 본고에서는 제외하였다.
20) 본문 중에 …第三期는 日露戰爭以後의 局面으로부터 日韓倂合調印까지의 三期… 운운하는 내용이 있고 사용된 원고지에 朝映·議政府撮影所 라고 인쇄되었다(『甲申政變記』, 2쪽).
21)申國柱는 국역저본이 경도대본이라고 주장했으나 (申國柱, 앞의 논문, 180쪽) 趙一文은 부인하고 있다(<조일문박사전화인터뷰>, 1997년 1월 21일).
22)김사억이 수집한 전사본에 포함되어 있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김사억, 「『갑신일록』에 대하여」『김옥균』, 북한사회과학원, 1964, 310쪽).
23)註 20)과 같음.
24)이 제목은 편집자가 자의적으로 붙인 제목일 것으로 생각된다.
25)김사억, 앞의 논문, 314∼315쪽
26)이 부분은 『日本外交文書』 및 『朝鮮交涉件錄』, 그리고 『舊韓國外交文書』第一卷 <日案1> 등에 중복·게재되어 있다. 아울러 갑신년의 기사는 『甲申日使往復抄』(寫本, 불분권1책, 16.5×17cm, 線裝)에도 실려 있다.
이 책의 표지 좌측상단에 錄이라는 大題가 붙어 있고 우측상단에는 甲申日使往復抄라는 글씨가 세필로 써 있다. 그리고 그 하단에는 前間氏所藏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국외유출자료로써 현재 일본 東洋文庫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를 1995년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영인하여 보관하고 있다.
27)金玉均等逃竄日本…竟爲洪英植之子所刺 則洪英植作亂 或爲金玉均之所誘(『甲申事變案』, 240쪽)라 하여 춘추사관적 입장에서 글을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기사에서 알 수 있듯 사실과 틀린 기술이 있으므로 사료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
28)생몰년미상. 譯官출신으로 본관은 草溪, 자는 大始, 호는 吉雲·蛛舡. 개화기에 武備自强을 위한 청나라에의 유학생 파견을 주선하기 위하여 請咨文을 가지고 1880년(고종 17) 別賚咨官으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이홍장과 4개조로 된 朝鮮國員辨來學製造操練章程을 체결하여 성공적인 외교교섭으로 유학생 파견을 가능케 하였다. 1881년 영선사 김윤식을 따라 청나라로 파견되어 군기제조학습을 위한 유학생단을 인솔하고 청나라로 건너가 그곳에 머물며 3차에 걸친 김윤식과 이홍장 회담에 배석하였다. 귀국 후 統理交涉商事務衙門 征<최0x7648>司의 참의를 거쳐 1884년 器械局辨이 되고 이어 지돈령부사·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姜在彦, 『韓國近代史硏究』, 한울, 1982; 李相一, 『雲養 金允植의 生涯와 思想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29)世系는 다음과 같다.
習敎 -- 尙容 - 光炫 - 壽氏 - 盛達 - 時潤 - 謙行 - 履積 - 厚根 - - 喬根 - 炳基 - 玉均
30)「吳世昌回顧錄」에 의하면 김옥균은 오경석의 사후에 유대치 등과 접촉을 하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 때 김옥균의 나이가 20세 전후였다고 한다. 하지만 오경식이 1879년에 사망하였고 김옥균이 1851년생이었음을 감안하면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古筠 金玉均 正傳』, 29∼31쪽).
31)이들이 최초로 접한 개화서적은 1책으로 된 『萬國史記』라고 한다. 한편 서재필은 오경석·유대치와의 접촉을 부인했는데 이는 老齡에서 오는 잘못된 기억인 듯하다(金道泰編, 『徐載弼博士 自敍傳 - 韓末史를 中心으로-』, 首善社, 1948, 60∼65쪽).
32) 이 때 『治道略論』을 저술했다고 전해진다.
33)妻 杞溪 兪氏사이에서 딸이 하나 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일본에서도 福澤諭吉의 하녀였던 마쓰노 나까 사이에서 딸 스즈키 사다코를, 그리고 야마쿠치 나미 사이에서 아들 후시키치를 낳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朝鮮日報』1926. 5. 12).
34)『新聞集成 明治編年史』제 6卷, 太學社, 1983(李光麟, 앞의 논문, 114쪽에서 재인용).
35)李光麟은 1885년 9월에서 12월 사이로 추정하였다(李光麟, 앞의 논문, 114쪽).
36)이른바 開化黨이라고 불리던 인사 중에는 갑신정변 발생시 주도세력에서 소외된 인사들이 있다. 尹雄烈·尹致昊 父子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변법적 개화파 사이에서도 정변을 분기점으로 세력의 분파가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靑木功一은 이들 세력을 獨立黨 혹은 復興派로 구분할 것을 제안했는데 이보다도 急進派란 용어가 좀더 적절치 않을까 한다(靑木功一, <朴泳孝の民本思想·新民論·民族革命論>(二)<朝鮮學報>82, 198쪽; 楊尙弦編, <韓國近代政治史硏究>, 사계절, 1985에 재수록).
37)嗚呼 予之否德 猥託民上 十有九年 不明厥德 政失民散 罪積于上…政令之從前不便於民者 悉令除之 擇循良之吏 以收群生 講究實效 思與一國更始(<承政院日記> 高宗 19年 7月 20日).
38)당시 통리군국사무아문의 운영은 당상관인 독판, 협판, 참의와 당하관인 주사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다. 이 중 실무적 책임을 맡고 있던 협판에는 金允植·閔泳翊·朴定陽·魚允中 등이, 참의에는 洪泳植·申箕善·魚允中·徐光範 등이 재직하면서 開化政策을 구체화시켜 나가고 있었다(韓哲昊, <統理軍國事務衙門(1882∼1884)의 組織과 運營> <李基百先生古稀紀念韓國史學論叢>下, 1994, 1542∼1545쪽).
39)묄렌도르프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W. Leifer 편, <묄렌도르프>(正民社, 1983).
P.G von Moellendorff: Ein Lebensbild, von R. von Moellendorff, 1930(申福龍·金雲卿 譯註, <묄렌도르프文書>, 평민사, 1987).
40)Harrington, ibid, p.19.
41)한철호, 위의 논문, 1551쪽.
42)余遂辭階 復至東京 初見外務卿井上馨 其言辭氣色 頓異前日 於我疑忌幷至 吾知竹添被穆輩之誣<황0x7C4B> 已有所報告 …固辨<노0x5A30><노0x5A30> 向日以傾意. 籍手于日本之策 歸告主上與政府者 悉歸誣罔矣 然其勢兩難 無復奈何 旣擧實狀議于米國公使빈감 得其周旋 以橫濱米國商人모스者 派于米國 乃至英國謨之 而因諸國不知朝鮮爲何之國 事不能如意 不得已遂對日本第一國立銀行澁澤榮一 一十萬或二十萬元 欲爲之貸與 然亦被外務卿不許成云(<甲申日錄略抄>2∼3쪽).
43)<약초>에서 김옥균은 차관교섭의 아무런 결과 없이 수포로 돌아가게 된 것은 목인덕과 민씨척족의 간계에 일본을 비롯한 각국의 관계자들이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근거해 김옥균의 삼차 도일이 국내보수세력과 결탁한 국제적 음모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는 주장을 펼치는 논자도 있다.
44)러시아에 대한 전통적인 경계의식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러시아와의 외교활동을 모색하려는 세력도 등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측 기록에 따르면 한규직·이조년·조정희 등이 露黨으로 분류되고 있다(井上角五郞, <漢城之殘夢>, 東京春陽書樓, 1891; 한상일역, <서울에 남겨둔 꿈>, 건국대학교출판부, 1993, 43쪽).
45)1877년 문과급제 후 淸華之職을 거쳐 1878년 이조참의가 되어 인사권을 장악하게 되었다(鄭玉子, <開化派와 甲申政變> <國史館論叢> 14, 1990, 212쪽).
46)遊泳翊之門者 時有八學士之目 李重七·趙同熙·洪英植·金興均·洪淳馨·沈相薰·金玉均·魚允中(黃鉉, <梅泉野錄> 卷一, 國史編纂委員會, 1957, 44쪽).
47)美國은 조선을 淸의 속국 정도로 취급하던 英國과는 달리 민영익의 귀국시 Foulk 해군소위를 호위무관으로 시종시킬 정도로-이는 淸과 日의경우에는 없었던 대우라고 한다-시종 開化勢力에 호의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辛基碩, <韓末外交史硏究>, 一潮閣, 1967, 113쪽).
48)韓太涉編, <古均 金玉均正傳>, 1984, 110쪽.
49)<고균 김옥균 정전>, 11쪽.
50)聯美論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宋炳基, <19세기 말의 聯美論 硏究> <史學硏究> 28, 1978.
宋炳基, <聯美論의 進展과 初期의 開化政策> <藍史鄭在覺博士古稀紀念東洋學論叢>(고려원, 1984).
51)러시아 警戒論의 유래는 가까이는 일본·중국, 그리고 본원적으로는 西歐에서 유래한 것이다(洪停杓, <金玉均의 國際政治觀>,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0, 74∼89면).
52)閔泳翊卽爲淸黨之魁 外作功斥吾黨之計 內而閔台鎬閔泳穆誣陷之計日甚(<甲申日錄略抄>, 5쪽).
53)我大君主爲其薄有才辯 略通外國之情 寵之以顯官 待之以親信 閔參判泳翊 嘗面斥其短 爲逆黨所忌(<變亂事實> <甲申日使往復抄>, 26쪽).
54)개화정책에 있어서 민영익의 보조역할에 머물던 김옥균이 이에 불만을 품고 그에 부재를 틈타 주변세력을 포섭하여 일시에 개혁을 성취하려 했다는 견해는 다소 과장된 견해라고 생각된다(정옥자, 위의 논문, 213쪽). 그러나 갑신정변이 발발한 후 첫 희생자로 민영익이 지목되고, 개화당에서 이탈한 환관 유재현이 비참하게 살해된 것은 私怨이 개입한 #이라고 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점이 갑신정변 실패의 한 요인으로#지적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변 자체의 진보적 성격을 제어하는 측면이라고도 하겠다.
55)임오군란 이후 광범위하게 유생들은 동도서기론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는 고종의 교서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權五榮, <東道西器論의 構造와 그 展開>, <韓國史市民講座> 7, 一潮閣, 1990, 90∼93쪽).
56)見今時局日變 事務日增 舟車交涉之路 營疊設操練之場 其所接應 決非前日自守之可比 則何可膠執例套 印行冗節 不思所以實事求是乎(<高宗實錄>, 1884年 6月5日).
57)盖言今日之先務者 其必曰 用人才也 節材用也 抑奢侈也 擴開海禁而善隣交也 此周闕一而不可 然區區愚見以爲莫若實事求是…(治道略論, <金玉均全集>, 亞細亞文化社, 1979, 3쪽). 강상규도 이러한 점을 지적하였다(강상규, 앞의 논문, 46∼47쪽).
58)이 기사에 대해 田保校潔이나 山邊健太郞 등은 위조되었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다(田保校潔, <近代日朝關係史の硏究>, 937∼938쪽; 山邊健太郞, <甲申日錄の硏究> <朝鮮學報>17, 131쪽). 하지만 필자는 김봉진의 주장처럼 다소의 과장은 있으나 비교적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59)承召入對 適得傍聽無人 余<감0x53B7>襟起拜曰 今天下大勢之日葛藤 內國情況日臻危困 固屬殿下所燭知 今不必贅 臣竊欲更一備細陣達 肯聽否 上曰 可余因以淸佛交兵事 日淸不和事 露國東略日臻切迫之事 及十許年來 西洋諸國之向東洋政略頓變 不可拘守舊規 而安穩自守之勢 以至國中政治 如當五錢之爲酷弊 民不能支保 誤雇穆麟德 事多失着 奸臣壅蔽聰明 籍淸而權等事(千言萬言有不可記)…上曰 卿心所在吾實知之 凡關於國之大計 當危急之時 一任卿籌謀 卿勿更疑(此則實心實語)(<甲申日錄略抄> 11月 29日字, 27쪽).
60)<略抄>에 의하면 11월 14일에 Foote 美公使가, 11월 24일에는 Aston英領使와 Foote 美公使가 은인자중을 당부하였다 한다. <尹致昊日記>에도 11월 13일자와 19일자에 각각 Foote 美公使가 개화당의 은인자중을 부탁하였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61)일본의 <自由黨史>에 의하면 後藤象二郞와 板坦退助은 淸佛戰爭의 틈을 타 淸세력을 조선으로부터 추출하기로 하고 프랑스로부터 100萬圓의 차관과 군함 2척을 지원받아 조선의 정치개혁을 추진하게로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계획을 後藤이 伊藤博文에게 발설을 하여 이후 일본은 조선에 적극적인 정책을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竹添進一郞은 1884년 10월 20일에 서울로 귀임한 후 변법파에 대한 적극적 지지를 호언하게 되는 것이다(김용구, <世界外交史>, 302∼303쪽).
62)개략적 상황은 다음과 같다.
領議政 李載元-고종의 從兄, 前後營使兼左捕將 朴泳孝-철종의 사위, 左贊成 李載冕-대원군의 자, 兵曹判書 李載元-고종의 종형, 判義禁 趙敬夏-대왕대비의 조카, 同副承旨 趙同冕-대왕대비의 종손, 兵曹參議 金文鉉-和順宮의 弟, 平安監司 李載純-대원군의 至親, 說書 趙漢國-대원군의 외손, 洗馬 李埈鎔-대원군의 장손.
63)주워진 상황이 어느 조건속에서든 큰 변화없이 계속될 것이라는 믿음-마치 일제시대 현실주의자들이 식민통치가 항구적이라고 믿은 것처럼-과 이로 말미암은 왜곡된 현실판단을 통칭하여 擬似現實主義라 지칭한다(박광주, <현대한국정치와 정치이념:의사현실주의로서의 패권주의> <부산정치학학보> 2, 1989).
64)石河幹明, <先生手記の變亂始末> <福澤諭吉傳> 第三卷, 岩波書店, 312쪽.
65)<변란시말>에서 10월 30∼31일, 11월1∼7일, 10일, 20일, 25∼30일,12월1일, 4∼6일까지의 기사가 중복이 된다.
66)김봉진, 앞의 논문, 90∼94쪽.
67)김옥균이 위조한 것이냐 혹은 왕의 명령을 받아 대필한 것이냐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벌어졌던 日本公使來護朕이라는 국왕의 청병의뢰서가 古筠 품에서 꺼내진 종이와 연필로 쓰여진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尹孝定, <韓末秘史-最近六十年의 記錄->, 113쪽; 申國柱, <韓國近代政治思想史>, 探求堂, 1975, 274∼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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